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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나’라는 슬픔 정연두와 니키리의 작품에 부쳐

2014.01.03

일주&선화갤러리

한국현대미술연속기획전 3회 전시 연계 ㅡ 글

처음으로 동시대 미술에 대해 글을 쓰게 된 나에게 그 대상이 정연두와 니키리라는 것은 거의 불운이다. 이 뛰어난 작가들의 재능을 알아보는 데에는 특별한 안목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이미 국내외의 많은 전문가들이 이들의 작업을 대상으로 명석한 글들을 써냈다. 그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점점할 말을 잃어갔다. 어떤 예술가에 대해 최초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최후로 글을 쓰게 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글은 ‘최초의 글’과 ‘최후의 글’ 사이의 어디쯤에 자리 잡는다. 나는 이미 최초의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놓쳤으니 차라리 최후의 글을 쓰는 사람처럼 써야겠다. 창작자의 의도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반대로, 작품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그 의도로부터 최대한 멀어져봐야겠다. 최후의 글이라면 그래도 되지 않겠는가. 꼭 이런 의도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대개의 사람들이 이들의 작품에서 느꼈다고 말하는 정서와는 좀 다른 것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내가 느낀 그 정서는 슬픔에 가까운 어떤 것이다.

홀린 주체(bewitched subject)의 ‘사이’ ― 정연두

정연두의 <내 사랑 지니>(bewitched, 2001~) 연작을 본다. 두 장의 사진이 나란히 놓여 있다. 우리는 대체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혹은 위에서 아래로) 사진을 본다. 먼저 보는 사진을 자연스럽게 기준으로 설정하게 되고, 뒤에 보는 사진이 그 기준에 가해진 변형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기준과 변형’을 판단하는 프레임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만, <지니> 시리즈의 경우 그것은 ‘현실과 꿈’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우리는 오른쪽 사진을 보고 나서, 다시, 왼쪽을 또 보게 되기 때문이다. 현실을 기준으로 꿈을 바라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반대로, 꿈을 기준으로 현실을 바라보게 된다. 이 과정은 어떤 효과를 낳는가. 현실이 단지 현실로만 존재할 때 그것은 폐쇄된 공간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자신이 폐쇄된 공간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그러나 그 공간에 꿈으로 통하는 문이 한번 만들어지고 나면, 주체는 자기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강렬하게 인식하게 된다. 요컨대 현실이 꿈과 나란히 놓이는 순간 벌어지는 일은 현실을 현실로 재발견하는 일이다.

정연두의 <지니> 시리즈는 감상자인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모델이 된 당사자에게 이 작업은 어떤 감흥을 느끼게 했을까. 내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정연두의 작품만이 아니라 그가 작업을 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몇몇 인터뷰에서 정연두는 작업을 시작할 때 모델에게 허심탄회하게 묻는다고 했다.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질문이라는 것이 대체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특히 이런 질문은 일종의 침입(invasion)과도 같다. 꿈이 있어서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는 말이 늘 옳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꿈 때문에 우리는 불행해질 수도 있다. 비슷한 말을 이렇게도 해볼 수 있다. 꿈을 잊고 살아가는 일을 측은하다 여기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 감각이지만, 어쩌면 우리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잊고 있던 꿈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 일인 것은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은 꿈 없는 삶/꿈 잊은 삶의 안온함/안전함을 붕괴시키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질문을 “너의 꿈이 무엇이기에 너의 현실은 이러한가?”라는 질문으로 바꿔 듣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정연두가 이 연작에 <내 사랑 지니>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그런 의미에서 또 다른 상념을 촉발한다. 물론 이것은 잘 알려진 대로 미국 ABS에서 방영(1964~1972)된 시트콤의 한국어판 제목이다. 그러나 나는 이 작가의 의도를 넘어서게 될 것이 분명한 방향으로 생각이 진행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앙투안 갈랑이 편집한 천일야화 제5권에 나오고 지금은 디즈니가 만든 애니메이션 <알라딘>(1992)에 제공하는 이미지들로 대중에게 각인돼 있는 이 지니(Genie)라는 캐릭터는 평범한 사람들의 꿈을 이루어주는 행복의 전령사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어권에서 “지니가 병 밖으로 나왔다”(the genie is out of the bottle)라는 관용구는 우리의 예상과는 반대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라는 뜻을 갖는다.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이 암시하듯 이는 상황이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관용구 속에 대중의 무의식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나는 이 관용구를 곱씹으면서, 꿈을 자각하는 순간이 우리에게 가져올 수도 있을 충격에 대해 생각한다.

다시 <지니> 시리즈를 본다. 현실의 모델과 꿈속의 모델은 거의 동일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야말로 지니가 나타나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배경만 바꿔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꿈을 실현시킨 사진들은 지나치게 정교하게 세팅돼 있어서 오히려 이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이것이 일시적이고 일회적인 마술일 뿐이라는 사실을 더 강조하는 효과를 낳는다. 그리고 이 연작에서 나를 오래 붙드는 것은 표정이 없는 인물들이 나오는 사진들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홀린 주체(bewitched subject)들 같다. 나는 지금, 정연두의 작품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감상에 반대하면서, 그의 작품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내가 느낀 것은 천천히 발생해서 오래 지속되는 어떤 파문이다. 그 파문은 두 사진 사이에서 나온다. 현실만 있다면 소박한 리얼리즘이 되었을 것이고 꿈만 있다면 힘없는 판타지가 되었을 것이다. 정연두는 현실과 꿈을 나란히 늘어놓고 그 두 사진 사이의 공간으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그 공간에 붙일 만한 가장 적절한 이름은 ‘진실’이 아닐까.

 

기획된 주체(projected subject)의 ‘사이’ ― 니키 리

니키 리의 <프로젝트>를 보면서 정체성(identity) 이 라는 개념을 피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 작품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덧붙이 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그녀는 여러 정체성들을 자 유롭게 수행하면서 정체성이라는 범주의 허구적 억압 성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이런 작업은 근대적 경계들이 무너진 탈근대적 상황의 예술적 표현으로 읽힐 가능성이 높지만, 나는 이 작업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예술작품으로 만들기를 원한 19세기 중반 댄디들의 21세기 버전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했다. “현대적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흘러가는 순간들 의 흐름 속에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 라, 자기 자신을 복잡하고 까다로운 세공(elaboration)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 현대적인 인간은 그 자신, 그의 비밀과 숨은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나 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발명하는 사람입니다.” (Michel Foucault, “What is Enlightenment?”) 니키 리가 하고 있는 작업이야 말로 자기(self)의 세공과 발명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는 생각이다.

<프로젝트> 연작을 보면서 나는 이중적인 감정을 느낀다. 자연스럽다는 느낌과 어색하다는 느낌. ‘이 얼마나 다채로운 정체성의 실험인가. 이것은 가능 하다. 그러니 시스템이 부여한 고정된 정체성을 과감 히 벗어던져라.’ 그러나 어느 사진에서건 우리는 그곳 에 바로 니키 리가 있다는 사실을 어김없이 발견하고 만다. 그녀가 머리 모양과 스타일과 심지어 피부 색깔 까지 바꿔도 우리는 그녀를 알아본다. 그리고 그녀를 알아보는 순간 우리는 그녀가 그녀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만다. 그녀가 1970년에 한국에서 태어난 이승희라는 이름의 여성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일까. 그러니 이것은 작품 외적인 정보를 작품 내부로 끌고 들어가기 때문에 생기는 일종의 노이즈인 것일까. 그러나 이노이즈 역시 이 작품의 일부분이라 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쩌면 이 작품들의 진정한 의도는(작품이 말하는) ‘니키 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와(작품 외적 정보가 말하는) ‘니키 리가 여기에 있 다’는 두 명제의 충돌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닐까.

정체성이라는 개념이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지만 이 개념은 충분히 엄밀하지 않다. 정체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층위가 두 개 이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정신분석학의 오래된 구별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다. 내가 ‘알고 있는’ 나와 내가 ‘모르고 있는’ 내가 있다. 라캉(J. Lacan)은 (이 개념이 흔히 사용되는 맥락과는 좀 다르게) 이를 자아(ego)와 주체(subject)로 구별한다. 내가 듣는 나의 목소리와 녹음된 나의 목소리가 전혀 다르게 들릴 때처럼, 우리는 내가 갖고 있는 나에 대한 이미지(ego)와 나를 실제로 규정하고 있는 나의 무의식(subject)이 썩 다르다는 충격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문제는 ‘자아’는 대체로 허구에 가깝다는 것이고, 그렇다고 ‘주체’에 도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데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의 정체성은 어느 쪽에 있는 것인가. 니키리의 작품을 보면서 이중적인 느낌을 받는 것은 이 질문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지의 층위에서 그녀는 자기 자신을 얽어매는 시스템 으로부터 계속 도망친다. 그러나 무의식의 층위에서도 그녀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니키 리는 없지만, 니키 리는 있다.’

나는 니키 리의 작품이 그와 동시대에 작업을 한 동세대 시인들과 공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2000년대 이후 한국시에 나타난 특별한 현상 중의 하나는 시가 소설을 닮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소설에는 캐릭터(character)가 있고 시에는 화자(persona, 가면)가 있다. 소설가는 자신과 구분되는 가짜 인물을 만들어내지만 시인은 어떤 화자를 택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시인 자신의 가면에 불과하다고 간주된다. 그런데 2000년대의 시인들은 마치 소설을 쓰듯이 캐릭터를 만들고 이야기를 축조하기 시작했다. 시인 자신이 누구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를 두고, 과거 세대와는 달리 국가, 민족, 부모, 이념 등등에서 자유로워진 해방된 정체성들의 자기 표현이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그리고 나 역시 거기에 일정 부분 동의하기는 했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누구도 될 수 있다는 것이 궁극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혹은 그렇게 믿는 일이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 <정체성의 유희>라는 비평적 상투어는 이론적 허상에 불과하다. 그들은 포스트모던하게 유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앓고 있다.”(졸고「진실은 앓는 자들의 편에」몰락의 에티카)

우리는 이렇게 경쾌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자유롭다, 나는 누구도 될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말라.’ 그러나 언젠가는 정반대의 말을 고통스럽게 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자유롭지 않다, 나는 누구도 아니다, 진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니키 리의 <프로젝트> 연작을 보면서 앞의 말이 아니라 뒤의 말을 듣는다. 특히 그녀가 사진 속에서 웃고 있을 때 나는 (아마도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 웃음에서 어떤 슬픔을 느낀다. 그 웃음이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를 찾아 여기까지 왔지만 여기에서도 진짜 나를 찾을 수 없었어.’ 이번에도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니키 리의 진실은 그의 프로젝트들 ‘사이’에 있을 것이라고. 우리가 이 작품에서 깊은 충격을 받는 것은 하나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여러 개의 프로젝트가 있다는 그 사실 자체 때문이라고. 어떻게 보면 우리는, 니키 리의 작품 속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부단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 역시 지금 이 순간 어떤 프로젝트 속에 들어와 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진짜 나일까.

 

나가며 ―
간극의 발견 혹은 창조

뛰어난 예술작품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정직하다는 점이다. 정직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은 윤리학적 덕목이 아니라 인식론적 덕목이다. 어떤 무엇을 정직하게 인식한다는 것. 그 무엇이란 무엇인가. 정연두의 작품에서 핵심은 두 개의 사진 사이에 있다. 한 인간의 진실은 현실이나 꿈 어느 한 쪽에 있지 않다. 진실은 현실과 꿈 사이에 있을 것이다. 니키리의 작품에서도 핵심은 여러 사진들 사이에 있다. 그녀는 여피족도 아니고, 히스패닉도 아니고, 펑크족도 아니다. 그녀의 진실은 그 정체성들 사이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이 ‘사이’를 ‘존재론적 간극’이라고 불러보자. 정직한 예술은 바로 이 간극을 정직하게 인식한다.

간극을 발견한다는 말과 간극을 창조한다는 말은 거의 같은 말이다. 간극을 발견한다는 것은 간극을 벌린다 (broaden)는 것이고, 간극을 창조한다는 것은 간극을 벌인다(start)는 것이다. 정연두와 니키리의 작품은 간극을 벌리고 또 벌인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가 ‘간극으로서의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왜 나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이런 나인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내가 나라는 사실 그 자체다.

– Shin Hyung Cheol –

 

심상대(1960~ . 고려대학교 고고미술사학 졸업)

 

1990년신형철(문학평론가 서울대 및 동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
한국일보 신춘문예 심사위원
2001년– 한겨레신문 . 씨네 21 등 평론 연재
– 저서 : 느낌의 공동체(산문), 몰락의 에티카(평론)

‘나’라는 슬픔 정연두와 니키리의 작품에 부쳐

2014.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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