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u
Close

Exhibition

대학로 플라타너스나무 : 박미나의 미술작품에 대한 내러티브

2014.01.02

일주&선화갤러리

한국현대미술연속기획전 2회 전시 연계 ㅡ 단편소설

혜화 로터리에서 이화로터리에 이르는 왕복 6차선 도로 양쪽에는 플라타너스 나무 가로수가 줄지어 있다. 혜화 로터리에서 바라볼 때 오른쪽에는 쉰아홉 그루, 그 반대쪽에는 마흔네 그루, 모두 백 세 그루다. 쉰아홉 그루의 오른쪽 행렬은 우리은행 혜화동 지점 곁 보도 끝에서 시작한다. 첫 번째 플라타너스나무는 외줄기로 곧게 뻗어 오르다가 두 줄기로 나뉘고, 그 두 줄기는 다시 각각 두 줄기로 나뉜다. 네 개의 줄기는 다시 작은 가지로 뻗어 푸른색 우리은행 간판과 ‘NY English Studio’라는 영문자가 붙은 이층 건물 위로 치솟는다. 두 번째 플라타너스나무는 물구나무서서 두 다리를 활짝 벌린 체조선수 모양으로 ‘우리가족 환전은 우리은행으로’라는 문구를 쳐다보느라 힘들어 한다.

세 번째 플라타너스나무 곁에는 새빨간 코카콜라 자판기와 흰 커피자판기가 맞붙어 있다. 커피자판기에는 밀크커피, 크림커피, 설탕커피, 블랙커피, 카페오레, 아메리칸, 율무차가 구배돼 있는데 맨 마지막 하나는 여분으로 남아 이름이 없다. 그 플라타너스나무 곁 차도 변에 택시를 세운 초로의 운전사가 설탕커피 종이컵을 손에 들고 길 건너편 건물에 붙은 ‘東星中ㆍ高等學校’라는 한자를 읽는다. 네 번째 플라타너스나무 옆에 선 철제 가로등 기둥은 ‘서울 아시테지 겨울축제’를 알리는 붉은 천 두 폭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뜨리고 그 밑 원통의 광고판엔 품바 포스터를 동여매고 있다. 네 번째 플라타너스나무의 미끈하고 흰 둥치는 보도를 사이에 두고 모닝글로리 문구점과 마주보고 있으며 모닝글로리 문구점은 콩이야 커피전문점과 어깨를 대고 있다. 그 콩이야 커피전문점 앞에 다섯 번째 플라타너스나무가 서 있다. 콩이야 곁에서 영업 중인 비어오크 주점은 출입문과 보도 사이에 덱이 있다. 주점 창가 자리에 앉은 한 쌍의 남녀가 그 덱에 내려앉은 겨울밤을 내다보며 주점 안에서 떠도는 잡음을 듣는다. 둘은 별로 할 말이 없다. 방금 전 영화관에서 이곳까지 걸어오면서 주연여배우의 신통찮은 연기와 싱거워빠진 스토리에 관해 입을 맞춰 흉을 보고난 뒤라, 이젠 더 이상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두 사람의 머릿속엔 여전히 그 멜로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야릇한 우연이 어쩐지 저희 연애의 내막과 같아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여자가 남자 에게 말한다.

“우리 결혼해 버릴까?”

남자는 금방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맥주잔을 입술에 대면서 눈길을 들어 덱 저편에 선 여섯 번째 플라타너스나무의 앙상한 잔가지 끝을 바라본다.

일곱 번째 플라타너스나무와 여덟 번째 플라타너스나무는 오층짜리 건물 앞에 자리하고 있다. 일층은 치킨매니어, 이층은 주모리, 삼층은 작은얼굴in약손명가, 사층 오층은 상가가 아니다. 아홉 번째 플라타너스나무는 오층 건물 끝에 위치한 서울호서아트홀 입장권 판매 부스와 마주하고 있다. 빨간색 몸통의 서울호서아트홀 입장권 판매 부스는 파란색 간판을 커다란 모자처럼 쓰고 있다. 열 번째 플라타너스나무는 둥치에서 세 가닥 줄기로 갈라졌고 그 줄기 사이에서 불가마 네온사인이 명멸하고 있다. 열한 번째 플라타너스나무는 둥치에서 두 줄기로 뻗었는데 한쪽 줄기는 굵고 곧지만 한쪽 줄기는 가늘게 뒤틀어져 육손이처럼 불균형한 모양이다. 그 육손이 모양을 한 플라타너스나무가 에델바이스 꽃집과 아트북 미술용품점 앞 인도 한가운데 기둥처럼 버티고 있다. 후드 티 위에 재킷을 걸친 남학생과 털북숭이 모자가 달린 점퍼차림의 남학생이 아트북에서 나와 열두 번째 플라타너스나무와 I LOVE Flat 대학로점 사이로 종종걸음 친다. 둘은 열세 번째 플라타너스나무 곁 횡단보도 끝에서 멈춰 빨간색 신호등을 바라본다. 그들 머리 위쪽 이층에 신선설렁탕 음식점이 있다. 횡단보도에 멈춰 선 그들과 그 곁 택시스톱에 줄지어 선 택시를 내려다 보며 설렁탕을 기다리던 노인은 문득 열세 번째 플라타너스나무를 바라본다. 매끈한 둥치가 자작나무와 같다.

열세 번째 플라타너스나무와 열네 번째 플라타너스나무 사이엔 이차선 샛길이 있다. 혼잡한 장소에 선 탓에 열네 번째 플라타너스나무는 다른 플라타너스나무와 달리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골목으로 이어진 전선가닥을 가지에 휘감고 있다. 전선 가닥은 LLOYD 매장 관자노리를 스치며 골목 안으로 사라진다. 열다섯 번째 플라타너스나무 옆 건물에선 구두와 가죽제품 몽땅 세일 중이다. 만원이라 적은 종이가 유리창에 붙어 있다. 열여섯 번째 플라타너스 나무 곁으로 지나가던 취객이 노래를 부른다. 누군지 행복하겠지 무척이나 행복할 거야―― 누군지 행복하겠지 무척이나 행복할 거야―― 그녀를 만난 그 사내가 한없이 부럽기만 하네――. 아무도 듣는 이 없다

열일곱 번째 플라타너스나무와 NEW BALANCE 건물 사이 보도에 선 청년은 생각에 잠겨 있다. 어쩔까? 어떡하면 좋아? 그는 이 난감한 상황 한가운데 자신을 던져두고 오히려 화를 내고 있는 여자를 생각한다. 팔짱을 끼고 어깨를 맞댄 여학생 둘이 횡단보도를 건너온다. 둘 가운데 하나는 입술을 빼물고 있다. 그들 앞 횡단보도 끈 보도 양쪽에 열여덟 번째 플라타너스나무와 열아홉 번째 플라타너스나무가 서 있다. 차도 변에 주차한 흰색 i30cw 승용차 안에 한 쌍의 남녀가 앉아 있다. 조수석에 앉은 여자는 핸드백을 가슴에 품어 안았고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통째 껴안고 키스한다. 여자는 상대방의 입술보다는 어깨를 조이는 상대방의 팔을 통해 애정을 감지한다. 그 승용차 바로 곁에 스무 번째 플라타너스나무가 서 있다. 스물한 번째 플라타너스나무와 스물두 번째 플라타너스 나무는 삼지창 모양으로 생겼다. 반면 스물세 번째 플라타 너스나무는 외줄기로 곧게 자라 야위고 키만 껑충한 소년 같다. 이쑤시개 모양을 한 스물세 번째 플라타너스나무로 인해 보도 cafe bene 간판이 또렷하게 드러나 보인다. 스물네 번째 플라타너스나무와 스물다섯 번째 플라타 너스나무 사이에게 소나무길이 시작된다. 막 우회전해 그 길로 접어든 택시 뒷좌석에 두 여인이 앉아 있다. 노파는 곁에 앉은 중년의 여인을 나무라고 곁에 앉아 핸드백을 뒤지던 중년의 여인은 노파에게 짜증을 낸다.

“엄마아…… 그만…….”

스물여섯 번째 플라타너스나무는 육차선 도로 건너편 건물에 붙은 ‘흥사단’이란 글자를 읽는다. 흥사단이란 글자는 스물일곱 번째 플라타너스나무와 스물여덟 번째 플라타너스나무 역시 하염없이 읽고 또 읽는 글자다. 스물일곱 번째 플라타너스나무는 그로 인해 다른 플라타너스나무와 달리 이제껏 마른 나뭇잎을 잔뜩 매달고 있다. 한 무리의 젊은 남녀가 그들 세 그루 플라타너스나무를 지나쳐 서울워드팝약국과 스물아홉 번째 플라타너스나무 사이를 걸어 가면서 너무 너무 춥다고 언구럭을 떤다. 서른 번째 플라타너스나무 맞은편 건물 이층에 학림다방이 있다. 다방 창가에 앉은 한 여인은 대로 저편 cafe Gabbiano 간판으로 시선을 던진 채 옛 노래를 듣고 있다. 지금 그 사람은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여인은 숨죽이고 속으로 노래를 따라 부른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여인은 여름날의 호숫가를 떠올린다.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노래가 끝나기 전 여인은 눈을 감는다.

학림다방 앞 보도에서 좁은 골목길 입구를 건너자 오른쪽으로 서울의대 학생회관의 담이 어둠속에 서 있다. 맞은편은 샘터파랑새극장이다. 샘터파랑새극장을 정면으로 서른한 번째 플라타너스나무가 서 있다. 방금 그 플라타 너스나무를 심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난 화가는 담을 등지고 서 있다. 그녀가 방금 붓으로 심은 플라타너스나무는 흰 둥치로 뻗어 올라가다가는 두 가닥 줄기로 나누어지고, 하나하나 붓질한 잔가지가 섬세하다. 미끈한 자신의 플라타 너스나무를 앞에 두고서도 화가는 만족스럽지 않고 누구에겐가 죄송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자신은 자신이고 플라타너스나무는 플라타너스나무일뿐이라고 자신을 달랜다. 서른두 번째 플라타너스나무는 서울대병원 출입문 한쪽 기둥을 마주보고 있다. 출입문 옆에 자리한 문화게시판 맨 왼쪽엔 산울림소극장에서 공연하는 킬리만자로의 눈 포스터가 붙어 있다. 서른세 번째 플라타너스나무 줄기는 두 개, 그리고 서른네 번째 플라타너스 나무 줄기는 네 개, 두 그루는 서울대병원 사철나무 담을 가리고 선 문화게시판과 공연안내도 곁 보도 한가운데 당돌하게 서 있다.

서른다섯 번째 플라타너스나무와 마주하고 있는 공중전화 부스엔 두 대의 공중전화가 있다. 공중전화 부스 양쪽엔 환경미화원 쓰레기 수거용 손수레 두 대가 노란색 배를 드러내 보이며 물구나무 서 있다. 그 플라타너스나무와 서른여섯 번째 플라타너스나무 사이에 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 서울대학교병원 간판이 안정감 있는 장방형 조형 물로 앉아 있다. 서울대병원 입구 출입도로를 건너자마자 성당 제단의 촛대 형상을 한 서른일곱 번째 플라타 너스나무가 있다. 양쪽으로 넓게 펼친 두 개의 굵은 줄기 위에 각각 한 개씩 작은 가지가 뻗어 올라 네 개의 양초를 동시에 꽂을 수 있다. 함춘회관 앞을 지나 신한은행 함춘회관 출장소 앞에 다다르면 서른여덟 번째 플라타너스 나무 곁에 서게 된다. 저편 이화로터리 쪽에서, 함흥약국과 종로소방서 맞은편에 선 마흔한 번째 플라타너스나무와 함춘약국 앞에 선 마흔 번째 플라타너스나무와 성공회 대학로교회 앞에 선 서른아홉 번째 플라타너스나무 곁을 차례로 지나면서 청년 둘이 이야기하고 있다.

“온종일 뭘 하는 지 네 일정을 다 알자는 말이 아니야. 단지 지금 네가 어디 있는지 알아야 나도 차분하게 일을 할 수 있잖아.”

“내가 늘 카톡 하잖아.”

“그렇게 어쩌다 시간 날 때만 엉뚱한 소리하지 말고……. 생뚱맞은 스티커 보내지 말고 지금 어디 있다, 무얼 한다, 언제 끝날 예정이다, 이렇게만 알려주면 되잖아. 그게 그렇게 힘들어?”

“그래 그럴게.”

소방차 출동시 정지하라는 팻말이 매달린 신호등 기둥 곁에 마흔두 번째 플라타너스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물속에 상체를 박고 활짝 벌린 두 다리로 연기하는 싱크로나이즈드스위밍 선수 모양을 한 그 플라타너스나무 때문에 행인은 즐겁고도 측은한 심정에 빠지게 된다. 종로소방서 곁 건물은 벽면에 Seoul jazz Academy란 명패를 매달고 있다. 전화번호는 02-7**-77**, 현재 2013학년도 신입생을 모집 중이다. 두 여학생이 어깨를 밀치며 그 건물 앞을 지나간다.

“언니보다 니가 더 이쁘면 되니――.”

“누가 그래?”

“내가!”

“진짜루? 진짜루 언니?”

마흔세 번째 플라타너스나무는 승천하는 용을 형용하느라 구불구불 휘어진 외가닥으로 보도 한가운데 서 있다. 그와는 달리 보도 끝에 단정히 선 마흔네 번째 플라타너스나무는 대학로7길 이정표를 매단 가로등 기둥 곁에 바싹 붙어 있다. 그 마흔네 번째 플라타너스나무와 마흔다섯 번째 플라타너스나무 사이에서 좁은 대학로7길이 시작된다. 그 골목길 안 다가구주택 주민이 즐겨 이용하는 비어오크 맞은편이 마흔다섯 번째 플라타너스나무 자리다. 장작불구이 통닭을 굽기 위한 참나무 묶음이 스물한 단, 비어오크 출입문과 화덕 사이에 단면을 가지런히 드러내고 쌓여 있다.

마흔여섯 번째 플라타너스나무는 산 도적놈 꼴로 거무튀튀한 둥치와 세 개의 줄기가 위협적인 직선으로 차도 쪽 하늘을 겨누고 있다. 그 플라타너스나무 맞은편에 비어오크 주점 두 개가 있는데, 주점 두 개 틈바구니에 솔로몬 의료용 가발 상점이 있다. 가발 상점 사장은 여러 해 전부터 처녀의 속살처럼 새하얀 마흔다섯 번째 플라타너스나무 와는 판이하게 다른 마흔여섯 번째 플라타너스나무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이놈은 왜 이래? 플라타너스나무가 맞아? 하고 웃었다. 참나무 장작 연기에 그을린 탓이 아닌가하고 그는 의심한다. 캠퍼스서림과 방송통신대학교 정문 사이에 횡단보도가 있고, 이쪽 캠퍼스서림 앞 인도 한가운데 마흔일곱 번째 플라타너스나무가 있다. 그 플라타너스나무는 두 아름드리 거목이다. 마침 맞은편 방송통신대학교 정문 앞 횡단보도 턱에 서서 양쪽으로 굵은 줄기를 벌리고 떡하니 버티고 있는 마흔일곱 번째 플라타너스나무의 우람한 자태에 감탄한 중년남자는 그 줄기 사이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그곳에서 혼자 살았으면 하는 생각에 잠긴다. 스쿠터를 타고 온 청년이 캠퍼스서림 옆집 선 학사서적 앞에 정거한다.

마흔여덟 번째 플라타너스나무도 마흔일곱 번째 플라타너스나무만큼이나 둥치가 굵다. 그 플라타너스나무 맞은편 에 위치한 CU 24시간 편의점과 곰탕이 곰탕집 사이 아이스크림 냉장고 곁에 황동 빛 밀로의 비너스상이 서 있다. 마흔아홉 번째 플라타너스나무와 쉰 번째 플라타너스나무 맞은편은 방식꽃예술원이다. 그 꽃집 건물 이층과 삼층 전면에는 ‘세한대학교 디자인학부’라는 글자가 적힌 현수막이 만장처럼 드리워져 있다. 마흔아홉 번째 플라타너스 나무는 희고 쉰 번째 플라타너스나무는 검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심장뇌혈관병원 맞은편에 선 쉰한 번째 플라타너 스나무와 쉰두 번째 플라타너스나무와 쉰세 번째 플라타너스나무는 간격이 일정하다. 쉰두 번째 플라타 너스나무와 쉰세 번째 플라타너스나무 사이 마을버스정류장에서 택시를 기다리던 할머니 두 분이 하늘을 쳐다보며 동시에 말했다.

“눈이 오네.”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KT 강북네트워크운용단 건물 맞은편, 쉰네 번째 플라타너스나무와 쉰다섯 번째 플라타너스 나무와 쉰여섯 번째 플라타너스나무와 쉰일곱 번째 플라타너스나무와 쉰여덟 번째 플라타너스나무 사이 보도 위로 티끌 눈이 하나둘 떨어져 내린다. 쉰여섯 번째 플라타너스나무는 옴투성이 병자 꼴을 하고, 쉰일곱 번째 플라타너스나무는 희고 매끈한 몸을 뒤틀며 교태를 짓고, 쉰여덟 번째 플라타너스나무는 청사초롱을 매단 가로등 기둥에 몸을 기댈 듯 기우뚱한 모양이다. 그리고 마지막 쉰아홉 번째 플라타너스나무는 홍익대학교 대학로아트센타 건물이 시작하는 지점 맞은편에 서 있다. 홍익대학교 대학로아트센타 벽에 붙은 공연 포스터에서 완득이가 쉰아홉 번째 플라타너스나무 줄기를 더듬으며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를 바라본다. 눈은 그로부터 오백 년 동안 하염없이 내렸다. 세상천지가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2513년 일월 어느 날밤, 한 소녀가 눈 속에서 얼음덩이로 변한 플라타너스나무 고사목 행렬을 바라보며 대학로를 걷고 있다. 동성중ㆍ고등학교 정문에서 청운예술극장까지 마흔네 그루, 우리은행 혜화동지점 옆에서 홍익대학교 대학로아트센타까지 쉰아홉 그루, 도합 백세 그루의 플라 타너스나무가 몽땅 얼어 죽었다는 소문은 사실인 듯 했다. 그러나 소녀는 대학로 한가운데, 샘터 파랑새극장에서 대로 건너편 서울의대 학생회관 담 아래 보도에서 걸음을 멈춘다. 초록의 이파리를 흐벅지게 열고 어둡고 싸늘한 하늘 저 끝까지 솟구친 서른한 번째 플라타너스나무가 그곳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소녀는 플라타너스나무를 쳐다보았다. 오백 년 전 어느 날밤, 붓으로 그 플라타너스나무를 그려 그곳에 심은 화가 처럼 그녀는 가만히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서른한 번째 플라타너스나무는 흰 둥치가 두 가닥 줄기로 나뉘고, 줄기는 다시 굵은 가지와 섬세한 잔가지로 뻗으며 연초록 이파리를 무수히 매달고 있다. 소녀는 지금 자신이 선 바로 이 자리에 서서 안경테를 매만지며 안타까워하던, 못내 만족스럽지 않은 눈빛으로 모든 이에게 죄송스러워하던 화가의 마음을 오백 년 만에 만난다.

– Park Yeonghun –

 

심상대(1960~ . 고려대학교 고고미술사학 졸업)

 

1990년「세계의 문학」 봄호에 단편소설 「묘사총」, 「묵호를 아는가」, 「수채화 감상」
3 편을 동시에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소설집 「묵호를 아는가」, 「사랑과 인생에 관한 여덟 편의 소설」, 「명옥헌」, 「망월」, 「심미주의자」,
「떨림」, 산문집 「갈등하는 神」, 「탁족도 앞에서」 등 출간.
2001년단편소설 「美」로 제46회 현대문학상 수상
2012년중편소설 「단추」로 제6회 김유정문학상 수상

대학로 플라타너스나무 : 박미나의 미술작품에 대한 내러티브

심상대

2014.01.02

일주&선화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