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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역사학자 정병준의 한국의 분단, 분단의 한국

2014.01.03

일주&선화갤러리

한국현대미술연속기획전 4회 전시 연계 ㅡ 글

한반도는 21세기 아시아의 유일한 분단국가이다. 155마일의 긴 휴전선과 철책, 긴장한 무장 병사들의 행렬은 분 단을 상징하는 징표가 되었다. 1945년 38선 분할로 시작된 이 분단은 세기를 넘어 68년을 경과하고 있다. 누구도 분단이 이렇게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 했다. 가혹했던 일제의 식민지배는 36년이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우리가 후삼국시대라 부르는 9세기 말 10세기 초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의 분립도 길어야 45년(892~936년), 짧게 보면 37년(900~936년)에 불과했다.

한국인들은 삼국통일 이후 단일한 역사적 실체, 단일한 국토, 문화와 언어를 공유해왔다. 1천3백 년 이상 지속된 공동체는 어느 순간 파열되었고, 그 분열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국인들은 분단을 옆구리의 상처, 손톱 밑의 가시처럼 느끼며 비정상적 상태로 인식했다. 일곱 세대를 경과하는 동안 분단은 우리의 삶 속에 파고들어 우리의 일 부가 되었다. 부자연과 부작위가 우리 삶과 동화된 것이다. 분단은 세계 체제의 창조물이자 냉전과 열전의 파생 물이었다. 일본의 식민체제에 편입되었던 한국은 세계 체제의 충돌 속에서 고통받았고, 전후 세계 체제가 재편 되는 틈바구니 속에서 미소 양국의 세력균형 정책의 결과 분단되었다. 식민지의 압력 위에 냉전이라는 이중 압력이 가해 졌다. 두 체제가 위력을 과시하는 틈바구니에서 가장 약한 고리였던 구 식민지가 으깨진 것이다. 분단된 남북은 달의 인력이 조수간만의 차를 만들어내듯, 막강한 강대국의 자력속에 빨려 들어갔다. 한국인들의 희망이나 자원이 아니 라 강제였고 강요된 결과였다.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양극체제 속에서 남북한은 새로운 제국 체제의 변경으로 재편되었고, 적대적 제국체제의 전초가 되었다. 집안은 분열되었고, 형제는 갈라져 원수로 마주했다.

1945년 강대국의 38선 분할은 1945~48년간 미소 냉전을 경과하면서 국가와 민족의 분단으로 이어졌고, 1950~ 53년간 한국전쟁의 열전을 거친 후 분단체제가 고착되었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 강대국의 냉전에서 비롯된 한반 도의 분단은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과거를 대변하고 있다. 냉전은 한반도에서 박물관의 화석이 아니라 살아있는 활화산으로 작동하고 있다.

38선 :
상상과 관념의 선이 현실을 가로지르다

1945년 8월 10일 저녁 미국 워싱턴 D.C의 한 건물에서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2명의 대령은 내셔널지오그 래픽 잡지의 조그만 지도를 참조해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북위 38도선을 그었다. 두 사람은 훗날 케네디 행정부의 국 무장관을 지낸 딘 러스크(Dean Rusk)와 미 8군 사령관을 지낸 찰스 본스틸(Charles Bonsteel)이었다. 5천 년의 역사와 3천만 명의 인구를 가진 이 유서 깊은 국가의 운명은 36세 대령의 손에 의해 불과 30분 만에 결정될 정도로 비극적이고 위태로웠다.

1945년에 접어들어 미 육군의 브레인들은 전후 한반도의 군사전략적 가치를 평가하는 한편 미국의 이익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는 군사적 점령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소련의 이익을 절충하는 다양한 분할선들이 구상되었다. 북위 38도선, 북위 40도선, 연합 4대국인 미국, 소련, 영국, 중국에 의한 4분할선 등이 구상되었다. 태평양전쟁을 조기에 마무리하기 위해 미국은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미국의 단독 일본 점령을 우려한 소련은 만주와 한반도를 향해 대일 공격전을 개시했다. 한반도에 가장 가까이 있던 미군은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었기에, 소련의 한반도 단독 점령을 저지하고 미군이 진주할 수 있는 최대 이익선으로 제시된 것이 38선이었다. 외견상 한반도를 양분한 것처럼 보이지만, 인구의 2/3가 남한에 존재했고, 수백 년간 정치 . 경제의 중심이었던 수도 서울이 포함되었으며, 인천, 부산, 군산, 목포 등 주요 항구가 이남에 포함되었다. 38선 분할은 갑작스레 결정되 었다기보다는 수년간 검토 . 준비된 정책의 발현이었다. 38도선 분할의 발안자는 헐(Cordell Hull) 중장과 링컨 (Lincoln) 준장이었다.

한편 소련은 미국과의 협조 체제를 지속한다는 구상 하에 이에 동의했다. 유럽에서 독일을 동서독으로 분할한 것 처 럼, 한반도 분할에 찬성한 소련의 최종 목표는 일본 분할 점령이었다. 한국인들은 알지 못했으나 한반도는 강대국이 요리하는 도마 위의 생선과 같은 신세였다. 38선 분할에 대한 연합국의 설명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군사적 편 의 도모였다. 일본군이 일본 본토, 한반도, 만주, 중국 본토, 대만, 인도차이나, 필리핀, 남태평양 도서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반달 모양으로 포진해 있었기 때문에 한 나라의 군대가 무장해제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결과 아시아 에서는 2개의 국가가 분단되었다. 한반도는 북위 38도 선으로,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분단되었다. 미국은 일본과 38선 이남의 한반도를, 소련은 만주와 38선 이북의 한반도를 점령하기로 했다. 인간의 이성이 창조해 낸 상상과 관념의 직선이 한반도를 가로질렀을 때 이는 인위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새넌 맥퀸(Shannon McCune)에 따르면 12개의 강과 75개 이상의 샛강이 단절되었고, 수 많은 산봉우리가 잘렸다. 181개의 작은 우마차로, 104개의 지방도로, 15개의 전천후 도로, 8개의 상급 고속도로, 6개의 남북 간 철로도 단절되었다.

당장 수많은 마을들이 38선으로 양분되었다. 경기도 연백군 화성면 화장리는 132가구, 781명이 거주하는 농촌이 었다. 해방 직후 이 마을은 38선의 정확한 위치를 모른 채 기존의 행정구역을 따라 북한에 포함되었다. 1945년 12월 38선이 마을 중앙을 관통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을 주민들은 투표를 실시해, 40가구는 북한에, 92가구는 남한에 편입하기로 결정했다. 38선으로 마을이 양단된 것이다. 설상가상 1946년 5월 소련군과 북한 관리가 나타나 이 마을이 북한지역이라고 선언했다. 날벼락을 맞은 마을 주민들은 러치(Lerch) 미 군정장관에게 진정서를 보냈고, 미 군정은 소련에 항의 편지를 보냈다. 이 마을의 사례는 워싱턴에서 결정하고 모스크바가 동의한 이 직선이 초래할 연속적이고 장기적 비극의 단면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국토의 분단이자 국가의 분열이었고, 민족적 불행의 출발이었다. 지각 있는 한국인들은 38선이 초래할 비극적 재앙의 전조를 감지할 수 있었다.

인식의 차이 :
해방 한국의 위상에 대한 엇갈린 시선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으로부터 독립을 공약 받은 아시아의 유일한 국가였다. 1943년 12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동한 미국 . 영국 . 중국의 3대국 수뇌부들이 한국 독립에 대한 국제적 공약을 발표한 바 있었다. 연합 국은 “한국인들의 노예상태에 주목해서, 적절한 시기에(in due course) 한국에 자유와 독립을 회복시킨다”라고 선언했다.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장제스 중국 총통이 한국의 독립을 옹호했으며, 그 배경에는 대한민국임시 정부의 강력한 반일투쟁이 존재했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선언은 한국이 즉시 독립이 아닌 적절한 시기의 독립, 즉 다자간 국제신탁통치라는 프로세스를 거쳐야 한다고 규정했다. 한국은 노예 상태에 놓여 있어 자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연합국의 관리를 거쳐야 독립에 이를 수 있다고 판단한 셈이다. 미주 한인들 사이에서는 ‘in due course’ 논쟁이 벌어졌고, 중국 한인들은 이를 국제 공관론(國際共管論), 국제 공영론(國際公營論)으로 부르며 깊은 우려 를 표명했다.

한국인들은 일제의 패망과 한국의 해방 . 독립이 직결된 문제라고 생각했다. 일제의 패전 직후 총독부와 타협의 산물 로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자, 지방과 서울에서 한국인들은 실질적인 행정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조선 총독부는 연합군의 진주까지 한국인들을 치안유지의 협력자로 활용할 생각이었지만, 한국인들은 자주 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주한미군사의 평가에 따르면 건준은 조직되자마자 일본인들이 통제할 수 없는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괴물”이 되어 버렸다. 한국인들은 해방과 독립의 기쁨을 만끽했지만, 실제로 연합국이 생각하고 있던 한국인들의 권리와는 현격한 인식의 격차가 존재했다.

분단은 일제 패망과 함께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일제의 패전과 미소 양군의 진주, 일본군의 무장해제, 일본인의 본국 송환, 해외 한인들의 귀국 등 대파란이 연이었다. 정치적 격변과 대혼란이 정확히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를 깨닫 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대소동의 먼지가 가라앉자 한국의 해방이 사실은 분단임이 드러났다. 누구도 원치 않는 결과였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 대신 식민지였던 한반도가 분단되었고, 일본이 아니라 한국에 군정이 실시 되었다. 한국은 진정한 의미에서 미 군정이 실시된 아시아 유일의 국가였다. 전쟁과 범죄는 일본이 저질렀고 그 가는 한국이 치른 것이다. 일본을 점령한 미국은 군국주의 해체와 민주화 개혁을 우선시했다. 육군성, 해군성 등 군국주의 기관의 해체, 전범재판과 정치 . 경제 분야의 전범 추방, 재벌해체, 노동개혁, 토지개혁 등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남한에서는 총독부 관리들이 유임되었고, 친일파 청산과 토지개혁은 저지되었다. 정책적 우선순위와 관심의 정도에 따라 즉각적 개혁과 현상 유지적 조치가 갈라졌고, 한반도는 아시아 지역에서 유일하게 소련과 경계를 마주한 냉전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 각자의 체제를 이식한다는 원칙에 합의한 바 있다. 소련 이 점령한 동유럽과 발트해 연안에 친소 위성국가들을 만든 것처럼, 소련은 북한 지역에 친소 국가를 수립하고자 했다. 미국 역시 자신이 점령한 남한지역에 친미적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 두 강대국이 국가주의적 정책을 추구하는 사이에 한국인들의 이익은 부차적이거나 무시되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개국 외무장관 회담이 내놓은 전후 공식 대한 정책 결의안은 무책임하고 비현실적인 내용 이었다. 미소 양 주둔군 사령부로 구성된 미소공동위원회가 임시 한국 정부를 수립한 후 5년에 걸친 미 . 소 . 영 . 중 4대국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결정이었다.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라는 두 날개로 구성된 이 제안을 한국인들 은 신탁통치 결정이라 부르며 격렬히 반발했다. 오랜 식민통치의 억압 속에서 가열되었던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는 해방의 대폭발과 함께 질적으로 다른 공간을 창출했다. 마치 옥수수가 팝콘으로 튀겨진 것처럼, 혹은 끓던 압력솥이 폭발한 것과 같은 형국이었다.

한국인들에게 신탁통치를 수용하라는 것은 엎질러진 물을 되담으라는 것과 같았다. 이런 측면에서 해방 후 4개월 만에 제출된 연합국의 정책은 너무 시간 지체적이었으며, 비현실적이었으며, 한국인들의 입장을 완벽히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욕적이었다. 또한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 실시라는 미국 . 소련의 2개 제안을 결합한 이 결정의 내용과 구조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외교 . 정치적으로 복잡한 프로세스를 현지 군인들에게 맡겨놓은 점 도 실현 불가능성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후 1946년과 1947년은 미국과 소련의 힘겨루기와 눈치 보기의 시기 였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1946. 3~5),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1947. 5~7)가 개최되었지만, 한국인들은 참가하지 못한 채 양국의 정치적 입장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모스크바 결정이라는 합의된 대한 정책이 무산되자 미소 양국은 각자 자신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한국문제 처리 방안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소련의 정책 :
자유기지노선과 민주기지노선

오랜 식민통치와 민족 . 계급적 갈등의 결과 해방 후 한반도가 혁명적 상황에 처했다고 판단한 소련은 간접 통치 . 현지화를 자신의 대한 정책 기조로 설정했다. 한국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혁명정부가 수립될 가능성이 높으며, 그 정부는 당연히 친소 사회주의적 정부가 되리라는 전망이었다. 때문에 소련은 후견자로 자처 하며,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도록 후원했다. 소련은 명목상의 군정을 실시하지 않았지만, 북한 체제를 완벽히 장악했다.

1946년부터 제기된 민주 기지 노선은 북한을 혁명의 기지로 삼아 친소 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남한에까지 확장한다 는 전술이었다. 1946년 토지개혁과 중요 산업 국유화를 중심으로 하는 소위 ‘민주개혁’이 실시되었다. 같은 시기 소련이 점령한 동유럽 국가에서 실행된 것과 유사한 이 개혁은 지주와 자본가를 타도하고 농민과 노동자를 공산당 주위에 결집시키는 것이었다. ‘민주개혁’을 통해 북한이 민주 기지로 거듭나게 된 것은 당연한 이치였으나, 한반도 차원에서는 불행이 예견되었다. 북한에서 존재를 부정당하고 모든 것을 빼앗긴 지주 . 자본가 및 그 가족들과 기독 교도들은 남한으로 밀려 내려왔다. 적극적 반공주의자로 변모한 이들이 남한에서 강력한 반공주의의 원동력이 되었다. 북한이 민주 기지로 거듭날수록 남한은 자유 기지, 반공 기지로서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거울 효과이자 풍선효과였다. 모스크바협정을 통해 미국과 함께 임시정부 수립을 공언했던 소련과 북한은 이미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라는 자치 정부 단독정부를 수립했고, 1946년 말 선거를 통해 1947년 2월에는 정식 정부인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설립했다.

그 반대편에 미 군정이 존재했다. 태평양전쟁기 미국의 대한 정책은 군사적 점령, 군정의 실시, 신탁통치 실시와 유엔을 통한 독립 방안이었다. 소련이 국내적 힘의 우위에 기대었다면, 미국은 국제적 힘의 우위를 정책의 기초로 설정했다. 미 군정은 직접 통치를 실시하며, 한국인들의 주권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주한 미 군정 법률전문가 에른스트 프랑켈(Ernest Frankel)은 멸망한 대한 제국, 26년간의 망명생활 끝에 귀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해방정국을 주도한 좌파의 조선 인민공화국 중 어느 쪽도 주권 정부로 인정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해방 후 한반도 에는 합법적인 한인 주권 정부가 없었기 때문에 미 군정만이 유일한 합법정부이자 사실상, 명목상의 정부로 기능하 게 되었다는 설명이었다. 미 군정 역시 미국에 우호적 정부 수립을 위한 방안으로 일종의 자유 기지 노선을 추구했다. 남한에 미 군정 주도하의 과도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북한 지역까지 확장한다는 구상이었다. 이를 위해 미 군정은 1945년 정무위원회 계획, 1946년 민주의원, 좌우합작위원회, 입법의원, 1947년 과도정부에 이르는 다양한 구상과 시도를 했다.

남북 두 지역에서 정식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군대가 창설되었고, 경찰과 행정기구들이 대폭 강화되었다. 미소 양 주둔군은 자국에게 우호적인 정부 수립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자 했다. 누가 먼저 시작했고, 누가 좀 더 적극적이었는가를 묻는 것은 무의미했다. 마치 거울을 마주 보듯, 미소 양군은 상대방을 의식하며 끊임없이 자신 들의 성채를 쌓기 시작했다.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산되자, 미국은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했다. 미국이 우위 를 점하는 국제적 우위를 이용하려는 시도였다. 소련은 이에 맞서 미소양군의 한반도 철수를 주장했다. 소련이 우위 를 점하는 국내적 우위를 이용하려는 시도였다. 한반도에 분단 정부가 수립되는 것은 회피할 수 없는 상태였다. 2차 대전 중 연합국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전후 세계질서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격렬히 대립하기 시작했고, 그 사이에서 냉전이 파생되었다. 유럽에서는 1947년 트루먼독트린과 베를린 공수로 냉전이 본격화되었지만, 한국에서는 이미 1945년 분단에서 시작된 냉전이 1946~47년간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확대된 상태였다. 초강 대국들은 서로 정면충돌을 회피했지만, 양 진영의 갈등은 그 영향력의 말단에 포섭된 남북의 대격돌을 초래했다. 적대적 제국 체제의 구심력에 포섭된 남북한은 상대방의 흡인력에 대항하기 위한 저항했고, 이러한 마찰이 열전으로 폭발하는 것은 정해진 이치였다.

미소 점령기의 38선

38선의 국제법적 근거는 일본군 무장해제였다. 일본군 무장해제가 종료된 1945년 말 38선의 설치 근거는 종료되 었다. 만주를 점령했던 소련군은 1946년 중반 철수했지만, 한반도를 점령한 미소 양군은 철수하지 않았다. 한국 인들의 주권이 부정된 상황 속에서 38선은 미소 양군에 의해서 일종의 주둔군 경계선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한국인과 물자의 자유로운 38선 이동을 제한할 수 있는 국제법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미소 점령기 동안 한국인들 의 38선 통행을 금지하는 법령은 존재하지 않았다. 미소 양군은 콜레라의 발생, 반체제 테러범의 침입 등을 이유로 38선 통행을 차단했다. 미군과 소련군은 38선상 인근의 도로에 초소를 설치하고 경계병력을 상주시켰다. 그렇지만 38선을 완벽히 차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국인의 왕래는 차단되었고, 철도와 도로는 끊겼다. 행정구역은 나뉘 었고, 교역도 중단되었다. 가장 오래 지속된 것은 우편물 교환이었다. 1946년 3월부터 시작된 우편물 교환은 격주에 한 번씩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체신부 발표에 따르면 한국전쟁 이전 남에서 북으로 간 우편물은 5,432통, 북에서 남으로 온 것은 7,807통에 불과했다. 점차 38선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한 선이 아니라 한국인들을 남북한으로 분할하는 구획선이 되었다.

38선의 가장 큰 문제는 어디에서 38선이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수많은 구릉과 산맥, 하천으로 구비치는 한반도의 지형 위에서 인공적인 38선의 경계선을 완벽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946년 2월 미 군정은 행정경계에 따른 38선의 재조정을 시도했다. 경기도는 미국 관할 지역으로, 황해도는 소련 관할 지역 으로, 강원도는 군계를 따라 조정하자는 제안이었다. 소련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이후 38선상에서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하자 미소 양군은 1946년과 1947년 2차례에 걸쳐 38선의 위치를 정확히 판단하기 위한 합동조사단을 운영 했다.

1946년 5월 미소 양군은 38선상 주요 도로에 총 21개의 표식을 설치했다. 말뚝에는 영어, 러시아로 ‘잠정 북위 38도 선’이라고 표시했다. 한국어는 표기되지 않았고, 한국 언론은 이 사실을 알지 못 했다. 그러나 여전히 경작지를 찾아 월경하는 농민들, 미소 양군의 월경, 청년단의 습격, 항공기의 월경 사고 등이 끊이지 않았다. 1947년 4월 미소 양군 53명으로 구성된 합동조사단은 38선의 직선거리 약 200마일의 7배에 달하는 총 1,436마일을 답사한 후 총 83개 소의 38선 표식과 총 129개소의 38선 이남 . 이북 1km 이내 마을표지판을 설치했다. 그러나 38선의 정확한 위치를 표시하면 표시할수록 분쟁은 증가했다.

미소 점령기 38선상에서 분쟁은 외교적 해결방안을 통해 해결되었다. 서울과 평양에는 연락장교단이 주둔했고, 무선통신이 연결되었으며, 서울과 평양을 왕래하는 정기 열차가 마련되어 있었다. 거친 항의와 비판이 오고 갔지만, 모든 문제는 외교의 틀 내에서 원만히 해결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 한국인들은 철저히 배제되었고, 또한 미소가 38선 문제를 처리한 시스템과 협조 정신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국인들은 38선 분단 과정과 운영 과정에서 배제된 채, 미소 점령 3년 동안 38선이 이데올로기의 장벽이자 분단의 실체로 굳어져가는 것을 목격했다. 미소가 철군하자 그들이 만들어 놓은 38선 분단의 모든 책임은 한국인들에게 전가되었다.

전쟁으로 향하는 길 :
38선 충돌

2차 대전과 한국전쟁 사이의 전간기(戰間期)에 위치해 있던 한국인들은 모든 비극의 출발점이 미소에 의한 38선 분단이라는 점에 의견이 일치하고 있었다. 당대의 지식인들은 미소의 점령 경계선이었던 38선이 남북한 정부의 국경선이 되면서 38선의 실질적 고정화, 국토 양단의 법리화, 민족분열의 구체화는 충분히 예견된다고 지적했다. 1948년의 역사 현장에 서있던 한국인들은 평화적인 통일이 무산되면 한반도에서 무력충돌, 즉 전쟁이 불가피할 것이며 이 전쟁은 내부적 갈등과 외부적 개입의 결과일 것이라고 보았다. 문화인 108인은 분단 정부 수립 이후 “민족 상호의 혈투”가 있을 것이며, 이 전쟁은 “내쟁(內爭) 같은 동족 전쟁(國際戰爭)이요. 외전(外戰) 같은 동족 전쟁(同族戰爭)”이 될 것이라고 규정했다. 즉 남북 분단에 뒤이은 전쟁이 있을 것이며, 그 전쟁은 내전(內爭) 같은 국제 전쟁 이자 국제전(外戰) 같은 내전(同族戰爭) 일 것이란 예견이었다. 비수같이 날카로운 지적이자 탁견 이었다. 이후 한국 전쟁의 성격을 둘러싸고 외국 학계와 국내 학자들이 수많은 논쟁을 벌였지만, 당대의 한국인들은 전쟁의 임박과 불회피성, 전쟁의 성격과 책임 등에 대해 일종의 합의된 공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아버지는 우익에 속한 인물이요, 내 아우는 좌익에 속해있다”라고 고백한 자유주의적 지식인 오기영은 미소의 사이에 끼어 분단 . 대립하는 한국인들이 ‘어육(魚肉)의 화(禍)’를 입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분단 정부 수립 이후 전쟁 발발 가능성은 한국 사정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38선과 남북의 분단은 한국인 이나 미국인 모두에게 불행이 임박했음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이었다. 1948년의 시점에서 주한미군 군사실 수석 군 사관 해롤드 라슨(Harold Larson)은 미소 양측이 남북한에 토착 군대를 양성했고, 미소가 동시에 철군하면 한국인들이 “의문의 여지없이 내전에 돌입해 서로의 목을 조이게 될 것”이라고 썼다.

김구는 1949년 5월 말 유엔 한국위원단과 만난 자리에서 남북한에 상반된 정권과 군대를 만듦으로써 전쟁의 씨앗을 뿌린 미소가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철수하는 것은 “남의 동리(洞里)에 와서 싸움을 붙여놓고 슬쩍 나가버 리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김구의 비유는 투박하지만 당대 한국인들의 심성과 정서를 잘 반영한 것이었다. 남한의 주요 정치인, 지식인들은 미소의 협력과 남북의 화해 없이는 전쟁이 발발할 것이며, 그 전쟁은 외형적으로는 내전의 모양으로 보일지라도 본질적으로는 미소가 개입한 국제전이며, 책임이 미소에게 있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당대를 살던 지각 있는 한국인들은 적절한 통일 노력과 긴장완화, 미소의 개입, 중 재가 없다면 이미 전쟁은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1949년 7월 김구의 암살 직후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과 만난 김규식은 남북 간의 전쟁을 회피할 길이 없다고 한탄했다. 한국에 부임한 지 불과 1년도 안되었던 햇병아리 외교관 헨더슨 역시 김규식의 말이 사실 임을 알고 있었다. 누가 선제공격을 할 것인지 특정할 수는 없었지만 전쟁이 임박했으며, 현 상태로는 회피할 수 없는 것임을 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1950년 6월 25일의 전쟁 발발은 결코 예측할 수 없었던, 혹은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진정한 불의(不意)의 전쟁은 아니었다. 누가 공격하며, 언제 공격할지 특정할 수는 없었지만, 한국 상황에 대해 지각 있는 사람들이라면 1948년 이후 한국의 운명이 전쟁으로 향하는 궤도 위에 올라섰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단일 궤도 위에서 서로를 향해 마주 보고 달리는 남북이라는 폭주기관차의 운명은 현명한 예언자가 아니어도 그 종막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주요 동력은 내부 갈등이었지만, 그 궤도는 38선 분단 이후 미소가 마련해 놓은 것이었고, 한국인들에겐 제동장치도 멈춰 설 적절한 여유 공간도 없었다.

남북한이 38선의 경비를 담당하기 시작하자, 남북은 도로 위의 초소를 버리고 고지로 올라가 진지를 구축했다. 1949년 2월부터 38선상에서 남북한의 군사적 충돌이 벌어졌다. 38선상 혹은 38선 인근에 위치한 산 정상을 둘러싼 충돌은 1949년 5~6월에 최고조에 도달했다. 양측에서 사단급 병력과 화력이 동원되었고, 사실상의 작은 전 쟁이 지속되었다. 충돌이 격화된 옹진반도(국사봉, 은파산), 개성(송악산), 양양(고산봉)에 모두 그러한 고지가 위치해 있었다. 38선이 정확히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 군사 지휘관들의 호승심과 중앙의 정치적 의도가 결합되면서 충돌이 격화되었다. 주한미군의 통계에 따르면 1949년 1~10월 간 38선상에서 총 563회의 충돌이 있었고, 북한군 70,625명, 한국군 45,803명이 참전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군은 1949년 2,617회, 1950년 1,147회 남한을 공격했다. 양쪽 모두 38선상에서 상대방의 공격으로 인한 대충돌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미국 외교문서에 따르면 1949년 7월 남한의 대북 공격설이 만연해 있었고, 소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1949년 9월 북한의 대남 공격 가능성이 고조되어 있었다.

이 시기 미국과 소련은 각각 남한과 북한을 억제하느라 노력했다. 특히 미소 모두 선제공격을 억제함으로써 전쟁 발발의 책임을 회피하는데 집중했다. 미국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5백여 명의 군사고문단을 한국에 파견했지만, 적절한 안전보장은 공여하지 않았고, 한국군의 호전적 북진정책을 억제하기에 주력하였다. 한국군의 위상을 6만 5천 명 규모의 방어 군으로 설정한 미국은 탱크, 비행기, 중포 등의 공격형 무기를 제공하지 않았다. 미국은 북한이 소련의 괴뢰이며, 소련은 미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펼칠 의사나 능력이 없기에, 미국 사절단이 주둔한 남한을 소련의 괴뢰인 북한이 공격하는 사태, 즉 소련에 의한 미국 공격은 없을 것이라는 잘못된 전제와 판단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소련은 김일성, 박헌영 등 북한 지도부의 대남 공격 요청을 거부하며, 선제공격은 안되지만 반격은 가능하다고 지시했다. 1949년 3월 김일성 등과 만난 자리에서 스탈린은 “절호의 반격 기회”를 강조했는데, 이는 북한 지도부가 전쟁을 구상하는 “도발 받은 정의의 반공격전”이라는 개전 계획의 핵심을 형성했다. 김일성은 중국 인민 해방군 내 한적 사병을 입북시켜 병력을 증강하고, 소련으로부터 차관을 얻어 탱크, 비행기, 대포 등 공격 무기를 도입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한국군이 공격하지 않자 김일성은 1949년 8월 옹진반도 점령 계획, 삼척 해방구 설치 등을 주장하며 선제공격을 시도하려 했다. 전면전의 가능성을 우려한 스탈린은 이를 저지하고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평양 주재 소련 대사를 문책했다.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 가능성에 모든 촉각을 곤두세웠다. 1949년 10월 중국이 공산화되자 정세와 판단이 변화했다. 마오쩌둥이 1949년 1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사이 스탈린은 김일성 에게 개전 허가를 위한 면담을 허락했다. 1950년 3~4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 박헌영은 마오쩌둥의 동의를 전제로 한 스탈린의 허가를 획득했다. 북한 . 중국 . 소련의 공산주의 3각 동맹은 미국이 중국 내전에 간섭 하지 않았으므로, 한반도에 개입할 가능성이 현저히 낮으며, 개입하려 하더라도 종심 400km 미만의 좁은 남한 전장에서 1개월이면 전쟁이 끝나기에 개입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2차 대전에서 단련된 스탈린의 군사 참모들이 평양으로 집결했으며, 이들의 주도하에 남한 공격을 위한 공격작전 계획이 수립되었다. 명령은 러시아어로 작성된 후 번역되거나 그 반대였다. 공격 작전명은 ‘반격 계획’으로 명명되었다. 1949년 스탈린의 교시 이후 북한이 염두에 둔 작전개념이었다. 기대했던 남한의 선제공격이 없자, 북한은 자신들이 공격당했기에 반격한다는 ‘정의의 반공 격전’을 주장하고 나서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이른 새벽 북한군의 대규모 침공이 개시되었다. 옹진에서 발화한 전투는 곧바로 개성, 춘천 등 38선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공격과 함께 북한은 한국군이 북침을 했다고 주장했다. 북침 지역으로 거론된 해주 방향 서쪽, 금천, 철원, 양양은 38선을 동서로 정확히 4등분 한 지역이었으며, 모두 1949~50년 남북 간의 군사충돌이 빈번하던 지역이었다. 북한은 이들 지역을 거론함으로써 남한의 선제공격을 위장하려 했지만, 전면적인 불의의 침공을 받은 북한측이 반격 개시 몇 시간만에 도리어 38선 전역에서 수 km씩 전진했다는 사실은 이것이 전면 남침이었음을 반증했다. 북한은 서울을 불과 3일 만에 점령했으나, 남한의 공격을 증명하는 단 하나의 증거 문서도 발견하지 못 했다. 공격이 없었으므로 문서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구소련 외교문서가 공개됨으로써 북한의 침공이 명백해졌다. 남침을 결정적으로 증명하는 수많은 문서들이 존재하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선제 타격계획’이라는 제목으로 작성된 3방면 공격 계획이다.

전쟁을 주도한 것은 김일성, 박헌영 등 북한 지도부였으나 개전의 결정권자는 스탈린이었다. 공산주의 세계의 지도자로서 스탈린의 결정권은 모든 것에 우선했다. 김일성은 “스탈린 동지의 말은 나에게 곧 법이다”고 할 정도 였다. 1950년 중공과 동맹조약을 체결한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북한 지원을 지시했고, 그런 전제조건 하에 개전 합의가 이루어졌다. 한국전쟁은 중국 공산화에 따른 제2막이었다. 공산주의 3각 동맹은 미국의 불개입을 자신했 으나, 미국은 전혀 다른 판단을 가졌다. 미국은 중국 공산화에 무기력하게 대응함으로써 아시아 대륙의 최대 면적과 인구가 공산화되었고, 아시아에서 미국의 위신 추락과 일본 상실을 걱정하게 되었다. 미국은 이 전쟁의 배후에 소련과 스탈린이 있다고 판단했고, 이에 상응하는 강도와 결의로 임했다. 개전 직후 미 육군 . 공군이 개입했고, 대만해협에는 제7함대가 파견되었다. 미군 24사단의 한 개 대대인 스미스 대대가 오산 북방에서 북한군과 조우한 것은 1950년 7월 5일이었는데, 개전 직후 불과 10여 일 만이었다. 그 후 10일 뒤 일본 주둔 미 24사단은 대전에서 북한군과 대적했다. 두 번의 전투는 미군의 참패로 귀결되었으나, 주일 미군 1개 사단이 신속 기동해 개전 후 불과 20여 일 만에 중부 내륙에서 북한군을 상대한 것은 미군의 해외참전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신속하고 강력한 대응이었다. 즉 미국의 대응 강도와 속도는 북한이 아니라 소련을 상대로 한다는 결의에 찬 것이었다. 미군의 항공력과 해군력은 북한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고, 북한군의 물적 . 인적 능력과 자원을 현저히 분쇄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의 강력한 대응을 통해 미국의 위신을 지켰고, 일본을 구원했으며, 대만을 방어했다. 즉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한국만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 추락하고 있던 제국의 위신을 회복했고, 공산화의 공포와 미국의 방기 정책에 근심하던 아시아의 잠재적 동맹국들을 구원해낸 것이었다.

미국의 참전과 유엔의 한국전 개입은 전쟁을 내전적 수준에서 국제전으로 전환시켰다. 한국의 운명이 위기에 처했던 1950년 7월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은 유엔군 사령관에게 이양되었다. 미국과 유엔은 북한을 침략자로 규탄했고, 소련과 중공은 북한을 옹호했다. 유엔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낙동강까지 밀렸던 전선은 38선으로 원상회복되었다. 1950년 10월 1일 유엔군과 한국군의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은 전쟁의 양상을 바꾸어놓았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변에 도달하자, 체제 위기에 직면한 중공이 전격적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함으로써, 전쟁은 자본주의진영 대 사회주의 진영의 국제전의 양상을 명확히 했다. 중국 인민지원군이란 이름으로 참전한 중국군은 1950년 12월 조중연합사령부를 창설하고 북한군의 지휘권을 인수했다. 이제 남북의 전쟁이 아니라 유엔(미국)과 중국의 전쟁이었다. 전쟁의 결정과 허가권을 지녔으며, 중국에 개입과 후원을 지시했고, 전쟁 중 막대한 군수물자를 제공하는 소련도 전쟁의 주역이었다. 남한 . 북한 . 미국 . 중국 . 소련 등 전쟁의 주요 행위 주체는 5개 국가였지만, 그 어느 쪽도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채 뒤엉킨 상태였다. 선전포고가 없는 냉전 시기 전쟁의 특징이 한국전쟁을 통해 분명해졌다.

중국의 공세로 전세가 역전된 1950년 말 미국은 한반도의 실함 가능성을 우려했다. 미국은 한국 정부 및 민간 엘리트 수십만 명을 제주도나 오키나와로 이동시킬 계획을 구상하기까지 했다. 1951년 3~4월 전선이 다시 38선 인근에서 교착되었고, 어느 한쪽의 일방적 승리가 불가능해졌음이 명백해졌을 때 이미 전쟁은 끝난 것과 다름 없었다. 미국은 압도적 화력과 제공권, 제해권을 장악했고, 중국은 압도적 병력의 우위를 점했다. 양측은 각자의 강점에 기초해 상대방을 압박했다. 이후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만 2년 4개월 이상 전쟁이 지속 되었다. 개전 직후 불과 10개월 동안 서울의 주인은 5차례 바뀔 정도로 심각한 기동 전이 벌어졌고, 이러한 ‘톱질 전쟁’의 피해는 고스란한 비전투 민간인들의 몫이 되었다. 전쟁은 한쪽의 승리나 평화협정으로 종결된 것이 아니라 휴전협정으로 종결되었다. 300만 명 이상이 희생된 이 전쟁은 분단이 초래한 어떠한 문제도 해결하지 못 했다.

전후 체제

한국전쟁은 세계 체제의 차원에서는 미소가 대결했으나 전면전을 회피했고, 미중은 제한전 수준에서 각자 우위를 점하는 병력과 화력 . 기술력으로 충돌했지만, 남북은 전면전이자 총력전으로 맞섰다. 그 유산으로 최대의 사상자와 증오가 남겨졌다.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남북한에서 약 280만에서 369만 명 가량(전체 인구 대비 10%)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사상자 규모는 이 전쟁의 참혹상과 비극의 규모, 그리고 그 유산을 설명해준다. 2차 대전기 전 세계의 인명피해는 2,200만 명이었고, 그중 프랑스는 120만 명이었다. 중일 전쟁부터 태평양 전쟁까지 소위 아시아 태평양전쟁 혹은 15년 전쟁 동안 발생한 일본의 사망자는 234만 명이었다. 만 3년의 한국 전쟁기 한반도에서 3백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단기간․단일 지역의 전쟁 사상자로는 엄청난 규모였음을 의미한다. 5인 가족을 기준으로 삼으면 1,500만 명의 한국인이 직계 가족 중 전사상자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전체 인구의 절반이 이 전쟁의 직접적 피해자였던 것이다.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족의 죽음은 시간이 지나거나 세대가 바뀐다고 해서 쉽게 잊히지 않았다. 여섯 세대가 지나며 수면 아래로 잠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전쟁이 초래한 죽음과 공포의 유산은 한반도에서 발생하는 모든 정치, 군사적 문제를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로 작동해왔다.

휴전협정을 통해 양측의 접촉선이 군사분계선이 되었다. 육상의 분계선은 설정되었지만, 해상분계선은 설정되지 않은 채 서해 5도만을 유엔군 관할로 명기했다. 서해 5도는 한국전쟁 직전 대규모 충돌을 야기했던 바로 그 옹진반도를 감싸고 있다. 1949~50년 시기 옹진반도에서 군사충돌이 벌어졌다면, 2000년대 이후에는 그 앞 바다인 서해 5도 북방한계선에서 군사충돌이 재현되고 있다. 전쟁은 종전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휴전된 상태이며, 전전의 관성이 태(態)를 바꾼 채 전후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을 통해 비로소 분단 질서와 분단체제는 한반도에 고착화되었고,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은 상이한 각각의 체제를 움직이는 내부 동력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전쟁을 통해 분단 질서가 대중 속에서 체험과 의식을 통해 내재화되었다. 이로써 미소 양국에 의해 시작된 한반도의 분단은 분단체제로 고착화 . 내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표본조사에 따르면 한국전쟁 중 월남자의 월남 동기는 정치 . 사상적 이유 38.7%, 국군의 피난 권유 25.0%, 토지개혁 등 재산 몰수 19.0%, 기타 17.3%였다. 전쟁과 북한 체제 경험은 살아있는 반공 교과서가 된 것이다. 북한에는 공산주의 .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전면화되었다. 나아가 상대 체제에 대한 적개심이 사회 . 국가의 정당 성의 원천이자 동력이 되었다. 그 결과 단일 민족의식, 공동체의식은 부정되고 해체의 위기에 몰렸다. 무력에 의한 적대 체제의 멸절을 주장하는 통일 방안이 설득력을 얻었다. 결국 한반도에서는 외세에 의해 국토가 분단되고, 이들의 대립 속에 국제냉전이 국내 냉전으로 전환되었다. 그에 상응하는 내부 동력에 의해 분단 질서가 형성 . 격화 되었고, 한국전쟁을 통해 분단체제가 자기 관성을 갖는 체제로 정립되었다. 체제 내부적으로는 강한 국가의 압력이 시민사회를 지배했고, 그에 기초한 강권적 통치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남북 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한 것이 되었다. 인적 교류와 인도적 조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전쟁기 남한에서 북한으로 월북, 납치된 인사가 약 30만 명, 북한에서 월남한 인사가 45만 내지 100만 명가량 되었다. 수백만의 이산가족이 파생되었지만, 분단체제의 장벽은 이들에게 인도주의적 상봉마저 거부하게 만들었다. 냉전기 동독과 서독 사이에는 활발한 인적 교류와 이동이 존재했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 동독에서 서독으로 매년 18~51만 명이 이주했고, 서독에서 동독으로의 이동은 매년 1만 9천~4만 7천 명에 달했다. 1950~1990년까지 동독에서 서독으로 총 521만 명이 이주했고, 서독에서 동독으로 50만 명이 이주했다. 베를린장벽은 그냥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남북한은 여전히 무력으로 서로를 위협하고 사소한 도발에도 응징하려 했다. 1950~60년대 내내 군사분계선과 해상에서 군사적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1960년대 후반 1970년대 초반이었다. 1968~1970년 3년간 비무장지대에서 충돌 711건, 후방에서의 충돌 290건이 발생했으며, 사상자는 미군 79명, 한국군 497명, 북한군 26명으로 집계되었다. 가장 위협적인 것은 1968년 북한군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사건(1.21사태), 미 해군 정복함 프에블로호 납치 사건, 울진 . 삼척 게릴라 침투사건, 1969년 EC-121기 격추 사건, 1976년의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등이었다. 미국의 강력한 억제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최소한 국지전 이상의 대충돌이 벌어졌을 것이다. 휴전선에서의 충돌은 1970년대 중반 이후로 대폭발을 멈추었지만, 화산활동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휴화산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남북 관계는 1972년 7.4 공동 성명, 1991년 남북합의서, 2000년대 2차례 정상회담 등 간헐적 화해의 파동이 있었으나, 군사 충돌 및 북한 핵문제로 대표되는 대결의 파동이 서로 교차해 왔다.

한국전쟁이 중단되었을 때 모든 것은 폐허로 변했다. 잿더미와 과부, 고아가 이 땅을 묘사하는 단어가 되었고, 그 위에 참을 수 없는 분노와 고통이 자리했다. 한국전쟁은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거의 모든 차원에서 이후 현대사 에 영향을 끼쳤다. 이후 한국 현대사는 전후 체제라고 불러도 무방한 것이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연병력 1,789,000명을 파견했고, 전사, 사망자 36,940명, 부상 92,134명, 실종 3,737명, 포로 4,439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한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가로 변신했다. 한국은 미국의 위신을 지키기 위한 동아시아의 냉전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미국인들이 피 흘려 ‘자유’를 지키기 위해 숨졌고, 미국인 납세자들의 세금이 이 나라를 공산침략으로부터 방어하고 정치 . 경제적으로 복구 . 부흥하는데 소모되었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945~65년 사이 미국 국고의 약 120억 달러가 한국에 투여되었다. 1950~70년대 내내 미국은 한국을 군사 . 경제 적으로 원조하는 유일한 국가였다. 미국은 한국의 생명력을 지탱하는 화수분이 되었다. 그 속에서 현명한 한국인 들은 미국을 활용해 경제적 성장과 민주주의의 진보를 강력하게 추진하기 시작했다.

1945~53년간 한반도에 분단을 만들어낸 여러 주체들의 모습도 변화했다. 공산주의 세계의 지도자였으나 책임을 다하지 않은 소련의 영향력은 북한에서 축소된 반면 중국의 영향력은 확대되었다. 시대가 변화를 불러와 사회주의 소련은 해체되었고, 중국은 시장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주체의 나라’ 북한은 사회주의 형제 국가들이 붕괴되자 완벽한 고립상태에 놓였다. 관대했던 시대에 미국은 한국과 자랑할만한 동맹관계를 형성했다. 냉전이 가능케한 동맹이었다. 이제 국제사회에서 냉전은 종식되었고, 현실 사회주의는 붕괴되었다. 분단을 초래한 구조와 힘은 변모했으나, 한반도에는 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있다. 구조와 힘이 파생시킨 동력이 여전히 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한반도에는 냉전이 아닌 열전이 계속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990년대에 접어들자 이제 역사의 추가 기울었다는 것은 명백해졌다. 상대편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는 일곱 세대를 건너뛰며 표면적으로는 진정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수면 아래에는 300만 명의 원한이라는 심연과 같은 고통이 자리하고 있고, 분단의 날선 이빨이 때때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곤 한다. 668년 고구려가 망한 이후 삼국 유민(三國遺民) 의식은 12세기까지 지속되었고, 1980년 광주의 희생은 한국 현대사에 20여 년의 시간을 요구했다. 끝나지 않은 전쟁의 여파가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더 많은 고통과 희생, 인내와 결의의 시간을 요구할지 가늠하기 힘들다. 세대가 지나 기억과 상처가 희미해진다고 평화가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진정한 화해와 평화는 과거와 정면으로 대면하고 진실을 공유하는 도정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분단과 전쟁이 초래한 이 모든 고통은 한반도 의 전쟁이 완전히 종식되는 순간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 Jeong Byeong jun –

 

심상대(1960~ . 고려대학교 고고미술사학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부교수
서울대 국사학과 및 동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사를 전공.
서울대, 한국외국어대, 방송대, 조선대 등에서 강의, 국사편찬위원회 역임.
50여 권의 한국 현대사 관련 자료집을 기획 · 해제했으며 여운형 · 박헌영 · 이승만 · 김구 · 김용중 · 김호 · 암두희 · 김계조 · 박순동 · 서태석 · 김성칠 등 근현대 인물과 정치사에 대해 글을 씀. 2005년 독도가 일본령에서 배제되어 한국령임을 보여주는 영국 외무성 대일평화조약 초안의 부속 지도를 발굴한 이래 독도 문제와 한미일 3국 관계에 대해 천착함.

저서로 『몽양 여운형 평전』 외 다수

역사학자 정병준의 한국의 분단, 분단의 한국

2014.01.03

일주&선화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