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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일상 속 아트 성북동 근대 문화예술의 산실

2015.02.26

문학가들의 동네, 성북동과 혜화동 사이를 거닐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혜화초등학교 방향으로 올라가면, 그 길 끝에 88올림픽을 기념해 만들었다는 ‘국민생활관’이 나온다. 국민생활관? 어째 이름에서 ‘국민교육헌장’이나 ‘국기에 대한 맹세’ 같은 1980년대 느낌이 난다. 도대체 뭘 하는 곳인지 정체가 궁금할 거다. 보기를 주겠다.

① 올림픽에 출전했던 해외 선수의 숙소
② 국민 생활 향상을 위한 고충 처리 민원센터
③ 스포츠센터.

정답은 ③번. 이곳은 수영이나 검도 등을 배우는 스포츠센터다.

답이 너무 싱거운가? 국민생활관 오른쪽에 나 있는 야트막한 언덕길이 혜화로 1길인데, 이 길로 접어들면 왼쪽에 서울과학고등학교가, 오른쪽에 경신중고등학교가 나온다. 이 두 학교는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돈의 팔촌조차 도. 그럼에도 마치 모교인 듯 친근한 느낌이 드는 건이 길이 내 산책 코스였기 때문이다. 아이가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여름밤이나 마음이 삐걱거리는 가을 오후면 나는 유모차에 아이를 태운 채 이 길을 걷곤 했다. 아, ‘걷다’라는 단어는 적합치 않다. 한 15°쯤 제법 각도가 나오는 길이라 낑낑거리면서 유모차를 밀고 올라가야 했으니까. 그러니 호젓한 ‘산책’이 아니라 힘겨운 ‘육아’에 가깝다. 어쨌거나 10분쯤 이 길을 가면 서울 성곽이 나온다. 여기서부터는 내리막길. 그런데 단 한 번도 그 길을 내려간 적은 없다. 심리적 거리감 때문이다. 서울 성곽부터는 ‘성북구 성북동’에 속하니, 단 몇 발자국으로 내가 살았던 ‘종로구 혜화동’을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성곽길에 다다를 때쯤이면 매 번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너무 멀리까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북동에 정식으로 발을 디딘 건 그로부터 십 년 후 간송미술관에 그림을 보러 갔을 때다.

 

시인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

성북동은 조선 시대에 도성을 지키는 군대가 주둔해 있었던 곳이다. 엄연한 한양 지역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던 걸 일 제가 한성부를 격하시키기 위해 1910년대에 경기도 고양시에 편입시켰다고 한다.(그때는 ‘고양시’가 아니라 ‘고양 군’이었다). 성북동이 지금처럼 ‘성북구 성북동’이 된 건 1940년대 말이 되어서다.

사람들은 성북동을 어떻게 알게 됐을까? ‘금왕 돈까스’처럼 유명한 음식점 때문에 알게 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가 성북동을 알게 된 건 ‘성북동 비둘기’라는 시를 통해서다. 이 시는 어느 해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순진무구했던 열네 살 소녀가 보기에 ‘성북동 비둘기’는 뭔가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듯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사실 김광섭의 시는 ‘생의 감각’이나 ‘저녁에’가 더 좋지만. 성북동은 김광섭이 노년에 살았던 곳이다. 그런데 그가 성북동 양옥집에 살았던 60년대 초반은 제2공화국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도시 개발이 우후죽순 시작되던 시기였다. ‘산동 네’ 성북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시는 그런 배경 속에서 지어졌다. 그런데 북정마을에 가보면 ‘성북동 비둘기’가 과 연 60년대만의 얘기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북정마을

성북로 23길을 하염없이 직진하다가 점차 가파른 길이 나오면 그곳이 바로 북정마을 초입이다. 북정마을로 가는 길은 ‘주 2 ~ 3회 땀이 약간 날 정도’로 운동 하는 사람에게는 그럭저럭 가뿐하다. ‘주 2 ~ 3회 호흡이 가빠질 정도’로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아주 만만하다. 하지만 나처럼 허구한 날 책상 앞에만 앉아 있는 사람에게는 다소 벅찬 길이다. ‘아이고, 힘들어.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하고 한숨을 쉴 즈음에야 ‘북정마을 안내도’라는 그림 지도가 나온다. 안내판에서 왼쪽 길로 올라가면 마을버스 정류장이 나오는데 여기가 북정마을의 하이라이트다.

북정마을은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달동네’라 불린다. 아직도 산신제를 지내고, 겨울에는 연탄을 때는 곳. 70년 대 모습을 떠올리면 머릿속에 북정마을이 그려질 것 같다. 그런데 어쩐지 불편하기도 하고, 애달프기도 하다. 보존 개 발추진회에서 내건 현수막이나 담벼락에 써 놓은 ‘개발 결사 반대’라는 글자가 이곳 상황을 넌지시 말해준다. 개 발이냐 보존이냐 이해가 엇갈리면서 진통이 있었던 모양이다. 북정마을은 서울시가 ‘2013년 우수마을공동체’로 뽑기도 했는데,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면 오래된 마을 공동체가 파괴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성북동 비둘기’는 북정 마을에서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곁들여서 안중식

북정마을에 왔다면 심우장(尋牛莊)을 지나칠 수 없다.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이 죽기 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서울 기념물 제7호로 지정돼 있다. 북정마을 버스 정류장에서 오른쪽 계단을 내려가면 나온다. 하지만 ‘금세’ 나오지는 않 는다! 사람 한두 명이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골목이 이어지는 터라 도무지 이런 곳에 심우장이 있을 성싶지가 않다. ‘이 길이 맞긴 맞나?’ 하고 다섯 번쯤 고개를 갸웃거리면 드디어 심우장이 나온다. 참 희한한 건 심우장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꾸준히 찾아온다는 점이다. 길찾기 특강을 들은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들 알고 오는지. 집이란 으레 ‘남 향’을 꿈꾸는 법이거늘 심우장은 북향집이다. 남향으로 지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돼 만해가 일부러 북향으로 지었다고 한다. ‘심우(尋牛)’란 글자 그대로 보면 소를 찾는다는 뜻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소가 진짜 ‘음매~’ 하는 소는 아니다.

불가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과정을 소에 비유해 ‘십우(十牛)’라 일컫는데, 십우의 첫 번째 단계가 심우다. 절집에 가면 벽면에 십우도가 그려져 있는 모습을 많이 봤을 것이다. “소는 누가 키우나?” 개그 프로그램에서 이 말이 유행한 후로 소를 찾는 것보다는 소를 키우는 데 더 관심이 많은 것 같기는 하지만, 나도 한때 소에 미쳐서 어떻 게 하면 그걸 찾을 수 있는지 고민했더랬다. 여전히 오리무중이긴 하지만. 그래도 만해는 소 찾는 데 성공했던 것 같 다. 그의 시 ‘님의 침묵’에서 말하고 있지 않은가.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 만날 때 떠날 것을 염려 하는 것처럼 떠날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고. 툇마루 위에 걸린 현판은 서예가 오세창의 글씨다. 오세창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조선 말기 때 화가인 심전 안중식이다. 장승업의 제자였던 안중식은 오세창의 ‘절친’이었다. 조선 시대 마지막 화원이었던 안중식은 고종과 순조의 어진을 그렸고, 오세창을 비롯해 여러 사람과 서화협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학교인 서화미술원(書畵美術院)을 만들어서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등 이른바 ‘동양화 10대가’를 길러낸 사람이기도 하다.

 

안중식은 직업이 화원이었기 때문에 기교가 뛰어난 사실적인 그림도 그렸지만, 문기(文氣)가 흐르는 그림도 그릴 줄 알았다. 예를 들어 북악산 자락 아래 경복궁을 그린 ‘백악춘효도(白岳春曉圖)’가 전자의 예시라면 ‘탑원도 소회지도(塔園屠蘇會之圖)’는 후자의 예시다. ‘탑원’은 탑골공원을 말하는데, 오세창의 집에서 탑골공원에 있는 원 각사지십층석탑이 보였다고 한다. ‘탑원도소회지도’는 1912년 정월 초하루에 오세창의 집에 여러 지인이 모여 도소주(屠蘇酒)를 나눠 마시는 모습을 담았다. 아마 안중식도 그 자리에 있었을 거다. 그러니 그림을 그렸겠지. 자 욱한 안개 너머로 원각사지십층석탑이 어렴풋하게 보인다. 1월이면 무척 추울 텐데 그림 속 풍경은 한없이 따뜻하고 그윽하다. 얼토당토않게 그 자리에 끼어 앉고 싶은 마음이 든다. 성북동의 예술산책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다음 성북 동 2부에서는 ‘수연산방’과 ‘노시산방’ 그리고 ‘간송미술관’에 얽힌 이야기를 전해드릴 예정이다.

며칠만 더 참고, 기다려 주시길

일상 속 아트 성북동 근대 문화예술의 산실

2015.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