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숲속의 화가를 찾아온 마녀들 : 정수진의 미술정신에 대한 콩트
2014.01.03
일주&선화갤러리
한국현대미술연속기획전 2회 전시 연계 ㅡ 단편소설
상수리나무 숲 속 인동덩굴로 뒤덮인 유리 지붕 아틀리에로 잠자는 화가를 찾아온 마녀는 다섯이었다. 알록달록한 고깔모자를 쓴 키 작고 오동통한 마녀는 오백 살이나 먹은 흰 염소, 황금색 머리칼을 가슴까지 드리운 채 거만한 걸음걸이로 그들 한가운데 선 마녀는 도롱뇽, 노란색 아이도우를 한 에스라인 몸매의 마녀는 백 년 묵은 지네, 키티 머플러를 두른 베이글녀는 능구렁이, 검정 부츠 안에 핑크빛 망사 스타킹을 신고 풍선껌을 씹으며 맨 뒤에서 걸어오는 마녀는 오소리의 변신이었다. 그들은 모두 화가에게 전하려는 작고 큰 선물 꾸러미 하나씩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오후 세시, 화가는 아침밥을 먹고 잠든 지 다섯 시간 째, 아직 일어나긴 이른 시각이었고 그래서 화가의 시종인 난쟁이 왕자가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여기는 잠자는 숲 속의 화가 아틀리에입니다.”
앞선 지네 마녀가 지붕을 덮은 인동덩굴 틈으로 쏟아져 내리는 여름날 하오의 따가운 햇살이 어룽대는 아틀리에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캔버스 앞으로 한 걸음 먼저 걸어들어 갔다. 캔버스 오른쪽 꼭대기에 바나나 세 개가 놓인 장방형 테이블이 조그마한 그림으로 놓여 있었다. 텅 빈 캔버스에 그림은 그 하나뿐으로, 테이블은 흰 식탁보로 덮였고 바나나는 노란색이었다. 바나나를 가리키며 지네 마녀가 활짝 웃었다.
“사과……” 하고 그녀가 말했다.
“바나나야.” 하고 오소리 마녀가 정정했다.
“아냐, 사과야. 풋사과!” 하고 지네 마녀는 제 안목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오백 살 먹은 흰 염소 마녀가 두 마녀의 오류를 정정했다.
“튜브 연고로구만. 복합 마데카솔 연고.”
“엄마아…… 그만…….”
도롱뇽 마녀와 능구렁이 마녀는 그들의 논쟁엔 상관하지 않았다. 둘은 봄이 오기 전에 화가가 기다리는 우주선이 이곳에 도착한다면 분명 그 우주선엔 생명을 가진 탑승자는 없으리라는 교수님의 말을 떠올리면서, 그렇다면 화가는 왜 우주선을 맞이하기 위해 카레라이스와 동파육을 준비하고 있는지, 교수님도 의아해하는 그 저의가 궁금할 뿐, 화가의 그림, 그림의 은유, 은유의 진면목인 화가의 분열 욕구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쨌건 다섯 마녀는 그림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노란 바나나 세 개가 놓인 흰 식탁보로 덮인 테이블 하나만 되똑 맞게 그려진 백색의 캔버스 주위 사면의 벽엔 수많은 그림이 완성됐거나 완성되지 않은 채 서 있거나 걸려 있었다.
“현실은 두려움과 망설임으로 자신을 지탱하고 있지요.”
하고 망사 스타킹 아래 무르팍을 매만지며 오소리 마녀가 말했다. 그녀는 남자의 얼굴 서른세 개가 그려진 커다란 그림 앞에서 그 그림을 설명하고 있었다. “몇몇 사람만이 그러한 두려움과 망설임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구현하고자 도발한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람도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완성하기보다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포기한 이상의 세계를 살짝 엿보도록 짧은 기회를 줄 뿐이죠. 그래서 현실은 현실로 존재하고 죽 이어져요. 하염없이…….”
오소리는 세 개의 발이 달린 분홍빛 수풀이 걸어가는 그림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을 계속했다.
“커피를 드시겠어요?”
노란 아이섀도에 검정 립스틱을 한 지네 마녀는 고개를 저었다. 난쟁이 왕자는 그 곁에 선 능구렁이 마녀에게 또 물었다.
“커피를 드시겠어요?”
키티 머플러를 두르고 파란색 코트를 폭 넓은 검정 가죽벨트로 묶은 능구렁이 마녀는 그제야 손을 뻗어 커피 잔을 받았다. 아무도 다시 묻지 않았으나 난쟁이 왕자는 또 말했다.
“선생님은 잠들어 있습니다. 저녁때가 돼야 깨어난답니다.”
능구렁이 마녀는 커피 잔을 든 채 갖가지 모양의 꽃송이가 오열을 지어 가지런히 늘어선 또 다른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현실이 가두어버린 이미지로부터 돌아서서 이미지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려 하지만 그 사이에 놓인 이야기라는 징검다리를 건너뛰기가 여간 힘들지 않아요. 그렇지 않은가요? 역사는 불필요한 간격으로 모든 우연을 정돈해 두고 있어요. 이야기라는 방정식으로.”
“젠장! 동굴에 틀어박혀 뻥을 치던 구루병 환자들 때문입니다.” 하고 한쪽 손 검지를 흔들며 지네 마녀가 말했다.
“정직한 사내들이 초원을 내달리며 사방팔방으로 날뛰는 동물을 상대하고 있을 때, 그들과 달리 몇몇 불구의 사내들은 동굴 벽 평면에 고작 죽은 동물의 운동을 모사했지요. 놀라운 일이 아닌가요? 그로부터 우리가 말하는 신화와 종교의 시대가 비롯됐어요. 뿐만 아니라 그 시대는 내러티브의 초기조건을 마련하면서 미메시스와 메타포의 세계를 구축했지요.”
지네 마녀는 눈을 크게 뜨고 머리를 좌우로 저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진정 위대한 사냥꾼은 고독하게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는 우선 애매한 논리의 유희를 즐기는 혈거의 구루병 환자들을 만족시킨 다음, 그들의 상찬을 발판으로 그들의 논리를 뚫고 그들로서는 형용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할 차원으로 이동해 침묵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곳으로 오지 않았소!”
하고 오소리 마녀가 웃었다. 그쯤은 이미 이곳으로 오기 전 몇 번이나 나눴던 말이 아니냐는 듯 그녀가 말했다.
“태중에 있는 태아의 생리적 율동과 음향에 대한 지각까지도 평면에 옮기고 부호화하려는 그들로부터 버림받은 우리가 지금 이 아틀리에에서 찾아내고자 하는 정신이 바로 그 침묵의 내막입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누군가는…… 말이 안 되는 세계를 현시해 그 누구도 말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우리가 그렇게 소원하지 않았던가요? 말로써 형용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요? 그래서 우리가 이곳으로 오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화가는 잠자고 있군요.”
황금색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도롱뇽 마녀가 불평했다. 풍선껌으로 푸 둥글고 흰 풍선을 만들어 보이며 오소리 마녀가 그런 도롱뇽 마녀의 어깨를 때렸다.
“그만, 그만! 우린 인간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신을 구원하려 하지 병든 신을 칭송하기 위해 극장을 지으려 하지 않습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들면…… 우리가 골짜기로 돌아가 태양에 지친 숲을 싱싱하게 되돌려 놓을 때면…… 그때면 화가도 침대에서 일어나 이 어수선한 실존의 중심을 파헤치고 그 끝까지 내려가 로고스와 뮈토스 이전 아르케의 세계에 이르게 될 테죠.”
“정신 사나운 소린 좀 그만두세요. 화가는 화가고 우리와 같은 감상자는 단지 감상자일 뿐입니다. 보세요! 이 솜사탕과 석류나무를 보세요.” 하고 지네 마녀는 사양(斜陽)에 물들어 환한 동쪽 벽에 기대어 선 그림 두 점을 가리켰다.
“자연을 모방하거나 자연의 유혹에 화답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 이전의 혼돈 그 자체를 이렇게 구상으로 구현하고 있어요. 어린아이는 솜사탕을 좋아하죠. 어른이 되면 왜 솜사탕의 맛을 잊어버릴까요? 그래서 화가는 몇몇 어른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그들만이라도 제 자신의 본질을 회복해 본능과 실존의 간격을 좁히고 그러한 혼돈 속에서 재생하고 진화하기를 기대한답니다.”
모두 그 그림을 바라보았다. 구름과 하늘을 그린 그림과 파도와 바다를 그린 그림이었다.
“화가는 아직 잠들어 있어요. 태양 아래서 나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기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두려움과 망설임을 떨쳐버리고 세상과 대면하기엔 우선은 우리네 인생이 너무 길어요. 비겁해지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길고 지루하죠. 하객 많은 결혼식처럼 어수선하고 분주하답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면 어린아이로 돌아가겠노라 투정 부리기도 어렵게 돼요. 아침이면 알람이 울리고 저녁에는 뉴스를 봐야 하니까 미칠 틈도 없단 말입니다.”
그런 뒤 다섯은 흩어져 저마다 한밤에 그린 그림에서 난무하는 색채의 애매모호함에 감동하고, 반복되는 형상을 통해 무성생식적(無性生殖的) 복제에 감탄하고, 무의식에서 이끌어낸 부호의 형용을 칭찬하면서 이쪽 손으로 저쪽 손을, 저쪽 손으로 이쪽 손을 주물렀다. 그런 중에도 도롱뇽 마녀와 능구렁이 마녀는 그림에서 평면으로 표현된 부분을 샅샅이 살피며 우주선 착륙의 흔적을 발견하고자 했다. 또한 둘은 그림 속에 그려진 음식물을 점검했는데, 무엇보다 밀폐용기에 담긴 채소와 구근 절임을 중점적으로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림에는 배춧잎과 팩 우유와 플라스틱 병에 담긴 우유와 캔 맥주와 소라 빵, 굳은 식빵, 삼각 김밥과 박카스 드링크, 바나나와 캔 콜라, 저장에 실패한 양파, 토마토, 와인, 병맥주, 유산균음료와 에스프레소 커피 따위뿐이었다. 교수님의 우려대로 화가가 은하계 밖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와 소통하면서 그들과 수시로 교류한다는 증거랄 수 있는 그림은 양파링 봉지와 블루베리 잼이 담긴 유리병과 호두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화가가 카레라이스와 동파육을 장기저장식품으로 만들어 숨겨두고 있다는 교수님의 말은 믿기 어려웠다.
그렇게 두 시간이나 지난 뒤, 뿌리와 싹을 동시에 빼물고 있는 작은 양파의 군집과 그들 뒤편의 가짜 바다 위에서 일렁이는 가짜 파도 위의 가짜 포말을 보고 있던 염소 마녀가 나머지 넷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어떤 화가도 법률과 수학의 세계를 그리지는 않지요. 캔버스 위에는 ‘0’이라는 숫자도 ‘π’라는 숫자도 ‘∞’라는 숫자도 그 태(態)를 그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한 숫자는 아르케의 영역에는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면서 덧붙였다.
“그래요. 수식이나 부호와 마찬가지로 현실은 실상이 아니랍니다. 현실은 단지 우리가 우리의 논리와 이미지로 조작한 절충 상태라 우리의 합의를 통해 규명한 진실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선 깨뜨려 속내를 살펴볼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화가는 그림을 그리죠. 술꾼들이 술을 마시고 전사(戰士)가 되거나 주정뱅이가 되는 내막처럼……. 그래요. 종국에는 거짓말을 통해 신성(神聖)을 확립하던가, 구상을 추상으로 구현하고 추상의 영역을 구상의 방식으로 오갈 때, 우리는 이 삼차원의 세계를 사랑할 수 있어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장 가혹한 아상(我相)과 마주할 때 비로소 해탈을 기도할 수 있답니다.”
그렇게 정신 나간 소리를 지껄여대면서 다섯 명의 마녀는 아틀리에 구석구석을 들쑤시고, 켜켜이 선 그림을 하나하나 들쳐보고, 요란하고 긴 방담의 유희로 자못 진지한 척하기에도 지친 뒤, 그때 도롱뇽 마녀가 나머지한테 오늘 밤 저희가 치러야 할 파티를 주지시켰다.
“교수님이 기다리고 있어요. 골짜기는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했을 테니까요.”
“아아, 그렇지!”
모두 알아차렸다.
“그래!”
오늘 밤 그들은 인간의 변신으로부터 본연의 모양으로 돌아가 춤추고 노래하는 파티를 열기로 했고 이제 곧 그 파티를 시작할 시각이었다. 천 년 묵은 여우로 자신의 본태(本態)를 회복한 교수님과 같이, 오소리와 지네와 도롱뇽과 염소와 능구렁이로 되돌아간 그들이 자신의 상상으로 마련한 또 다른 세계, 혼돈과 미망의 저편, 할미꽃이 즐비하게 깔린 안개 낀 숲 속의 버덩, 그곳에서 고통의 단말마로 맞이하는 쾌락과 자멸의 시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섯 마녀는 각자 들고 온 선물 꾸러미를 화가의 반월형 탁자 위 물병과 티슈 박스 곁에 쌓아두고, 둥글게 둘러서서는 손을 뻗어 다섯 개의 오른손 검지를 맞댄 뒤 한가운데로 시선을 모으고 소리 없는 주문을 외었다. 그러자 다섯 개의 검지 위에서 한 송이 할미꽃이 피어나 나풀나풀 춤추기 시작했다. 다섯 마녀가 염력을 더해 피워 올린 애정의 상징으로 화가에게 바치는 또 다른 선물이었다.
“안녕!” 하고 다섯 마녀가 난쟁이 왕자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화가 선생님이 잠에서 깨어나거든 우리의 경배를 전해주렴.”
“네.”
펑! 하고 다섯 마녀가 사라진 뒤에야 구형 로봇은 인사말을 마쳤다.
“안녕히 가세요.”
기계적 수명이 다 된 탓에 굼뜨기만 한 난쟁이 왕자는 그때까지 쟁반을 들고 있었고, 쟁반 위에는 빈 커피 잔 세 개와 식은 커피가 담긴 커피 잔 두 개가 여전히 놓여 있었다. 난쟁이 왕자는 삐걱거리며 움직였다. 금색 리본 장식을 한 그의 검정 구두 두 짝이 동시에 주방을 향해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곧 잠에서 깨어나 캔버스 앞에서 밤새 흐느낄 화가를 위해 저녁식사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다섯 마녀가 두고 간 선물 꾸러미와 그 위에서 한들한들 춤추는 할미꽃에 관한 궁금증은 그다음에 생각할 일이었다.
– Sim Sang dae –
3 편을 동시에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소설집 「묵호를 아는가」, 「사랑과 인생에 관한 여덟 편의 소설」, 「명옥헌」, 「망월」, 「심미주의자」,
「떨림」, 산문집 「갈등하는 神」, 「탁족도 앞에서」 등 출간.
잠자는 숲속의 화가를 찾아온 마녀들 : 정수진의 미술정신에 대한 콩트
2014.01.03
일주&선화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