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아니였으면 못 봤을 진흥왕순수비
2015. 12. 16.
진흥왕(신라 24대왕)이 개척한 국경지역을 순수(왕이 나라 안을 두루 살펴보며 다니는 일)하면서 그 기념으로 각지에 세운 비석이 ‘진흥왕순수비’입니다. 진흥왕은 고구려와 백제를 공략하여 신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고, 새로 편입된 영토와 백성들을 신라에 편제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순수는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으로 진흥왕은 이곳에 순수비를 세워 자신의 의지를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했습니다. 경남 창녕의 ‘창녕비’, 북한산의 ‘북한산비’, 함남의 ‘황초령비’, 함남 이원의 ‘마운령비’는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중 추사 김정희 아니였으면 북한산진흥왕순수비를 아직 못 알아봤을 수도 있었습니다.
조선 순조 16년(1816년) 추사 김정희가 진흥왕순수비임을 알아보기 전까지 ‘무학대사의 비’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내년이면 추사가 진흥왕순수비를 알아 본 지 딱 200년 됩니다.
“1816년 7월 어느 무더운날 추사는 친구 김경연과 더위도 식힐 겸 북한산 비봉(백운대)에 올라 갑니다. 발 아래 시원한 풍경을 보고 나니 옆에 우둑허니 서서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몸에 새긴 무학대사 비의 흐릿한 글씨가 눈에 들어옵니다. ‘누구는 신라 도선국사의 비석이라고도 하던데….’
추사는 손으로 글 하나하나를 만져가며 헤아려 봅니다.
‘어라?’
그 내용이 좀 심상치 않습니다. 추사는 무더운 날씨도 잊은 채 글자 하나하나를 만지고 또 만지고, 보고 또 봅니다.
‘김경연, 자네 이 글 좀 보게’
높이 15m나 되는 거대한 비석의 글씨를 두 선비가 하염없이 봅니다. 몇칠 후 추사는 비석의 탁본을 떠서 68자를 해석해 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신라 진흥왕순수비임을 알아냈습니다.
아마 추사가 이렇게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하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추사는 “옛것을 좋아하여 때로는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고, 경전을 연구하느라 여러 날 시 읊기도 그만뒀다(好古有時搜斷碣, 硏經婁日罷吟詩)”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으니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진흥왕순수비
진흥왕(신라 24대왕)이 개척한 국경지역을 순수(왕이 나라 안을 두루 살펴보며 다니는 일)하면서 그 기념으로 각지에 세운 비석이 ‘진흥왕순수비’입니다. 진흥왕은 고구려와 백제를 공략하여 신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고, 새로 편입된 영토와 백성들을 신라에 편제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순수는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으로 진흥왕은 이곳에 순수비를 세워 자신의 의지를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했습니다. 경남 창녕의 ‘창녕비’, 북한산의 ‘북한산비’, 함남의 ‘황초령비’, 함남 이원의 ‘마운령비’는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중 추사 김정희 아니였으면 북한산진흥왕순수비를 아직 못 알아봤을 수도 있었습니다.
조선 순조 16년(1816년) 추사 김정희가 진흥왕순수비임을 알아보기 전까지 ‘무학대사의 비’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내년이면 추사가 진흥왕순수비를 알아 본 지 딱 200년 됩니다.
“1816년 7월 어느 무더운날 추사는 친구 김경연과 더위도 식힐 겸 북한산 비봉(백운대)에 올라 갑니다. 발 아래 시원한 풍경을 보고 나니 옆에 우둑허니 서서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몸에 새긴 무학대사 비의 흐릿한 글씨가 눈에 들어옵니다. ‘누구는 신라 도선국사의 비석이라고도 하던데….’
추사는 손으로 글 하나하나를 만져가며 헤아려 봅니다.
‘어라?’
그 내용이 좀 심상치 않습니다. 추사는 무더운 날씨도 잊은 채 글자 하나하나를 만지고 또 만지고, 보고 또 봅니다.
‘김경연, 자네 이 글 좀 보게’
높이 15m나 되는 거대한 비석의 글씨를 두 선비가 하염없이 봅니다. 몇칠 후 추사는 비석의 탁본을 떠서 68자를 해석해 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신라 진흥왕순수비임을 알아냈습니다.
아마 추사가 이렇게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하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추사는 “옛것을 좋아하여 때로는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고, 경전을 연구하느라 여러 날 시 읊기도 그만뒀다(好古有時搜斷碣, 硏經婁日罷吟詩)”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으니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추사 아니였으면 못 봤을 진흥왕순수비
2015. 12. 16.